기독교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외친 한국 여성들 한국 최초 여성 AWAKE 운동!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여성들에게 미친 공헌은 매우 크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희망의 빛’과 같았다고 말한다. 남존여비사상과 봉건사상을 타파하기 위해 1885년 메리 스크랜턴(Mary F.Scranton) 선교사가 세운 최초 여성 기독교학교(이화학당). 이 학교를 시작으로 기독교 여학교가 전국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배화학당과 정신여학교, 평양의 정의여학교와 숭의여학교, 개성의 호수돈학교, 원산의 루씨여학교, 부산의 일신여학교, 광주 수피아여학교, 목포의 정명여학교, 신의주의 숭정여학교가 세워졌다. 학교를 통해 여성들은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여성, 아동, 교육, 의료, 위생, 보건, 여성 계몽 등 사회운동의 주체가 됐다. 이름 석자로도 제대로 불리지 못했던 조선의 여성들. 하지만 선교사들의 교육과 헌신을 통해 조선의 여성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당시 나라를 잃은 이 땅을 되찾고자 독립운동과 여성 인권을 위한 사회운동을 펼쳤던 여성들을 알아본다.

1.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1900~1950]

“왜적에게 뺏긴 나라 되찾기 위해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 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102년 전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벌인 3.1만세운동에 앞장서 대한민국이 주권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알린 신앙의 선배이자 대한민국의 애국자 윤형숙 열사.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전도사로 여수 지역을 섬겨 온 윤형숙은 순천 선교사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순천 성서학원을 이수한 뒤,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는데 재학 중 일제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민족의식을 키워 왔다. 

19세가 되던 해인 1919년 3.10광주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태극기를 든 왼쪽 손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등 크게 부상한 채 옥고를 치렀다.   

만세운동으로 크게 부상한 윤형숙은 그 후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자신의 고향 여수로 왔다. 여수제일교회, 여수중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문맹퇴치운동, 남북통일과 공산당의 잔학상을 전하는 등 개인의 이익보다 민족과 이웃을 먼저 생각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여수까지 내려오게 됐는데, 그때 많은 기독교인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처형되었다. 그 당시 200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그중 한 분이 민족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이다. 여수에서 계몽운동을 해 왔던 윤형숙 전도사도 그때 처형당했다.

윤형숙 열사는 3.1만세운동과 6.25전쟁을 거치며 누구보다 격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라를 사랑했던 그 마음을 이제 우리들이 본받고 다음세대에게 윤형숙 열사의 신앙과 나라사랑 정신이 이어지길 바란다 (2021년 2월 24일 CTS뉴스 참고).

2. 조신성 [1874~1953]

    “가슴에다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하며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다녔습니다.”

“조선을 깨운 여성운동가" 조신성은 19세에 남편을 사별하고 홀몸이 된 조신성은 서북 지역의 항일운동을 이끌며 맹산독립청년단을 조직했다.

1874년 10월 3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조신성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 여자로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유복한 집에 살며 부족함 없이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홉 살 때 조신성을 아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 고모의 뜻에 따라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강제로 혼인했다. 19세 때 남편이 사업하다 자살하자 과부로서 의지할 곳 없이 지냈던 조신성은 1987년 24세가 되던 해 의주를 떠나 한양으로 왔고, 혼자 교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존엄한 인간이라고 인정해 주고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밖에 없었다. 여성들이 문자와 근대 지식을 배우고 자신에 가해지는 억압을 설명할 언어를 배우는 유일한 장소가 교회였던 것이다. 조신성은 후일 살아남기 위해 교회에 갔다고 말했다.

남대문 근처 상동교회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숙식을 해결하기 어려웠던 시간에 스크랜튼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화학당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하고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반장과 청년회 회장도 맡았다.

1902년 이화학당 국어교사로 활동하며 상동교회가 운영하는 교원양성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전덕기, 안창호 등 상동파 민족 운동가들과 교분을 갖게 된 조신성은 그 당시 상동파의 영향으로 이화학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그 무렵 우리에게 친숙한 헤이그 특사 이준과 조선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 후 조신성은 35세 때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 그리고 더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본 유학길을 떠났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신성은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진명여학교 교장을 지내며 여성교육사업에 힘썼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무장투쟁에 뛰어들었고, 독립단의 본부였던 ‘맹산호국독립단’을 창설해 총과 다이너마이트 같은 무기와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일본 경찰을 위협하며 남성 못지않은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조신성은 1927년 식민지 시기 대표적인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와 독립계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에 참여했지만 이 사건으로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조신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천교회에서 ‘부인전도회’와 야학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희망을 지피기도 했다. 조신성은 그의 삶의 방식대로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누구보다 앞서 배움을 갈망했고, 총을 들고 산중으로 뛰어들어 독립군을 이끌었다. 교육이 필요한 곳에 학교를 세웠고 뜻을 세우며, 실천에 옮겼다(2019년 2월 4일 CTS뉴스 참고).]

3. 김경희

김경희 어린 시절 자료는 거의 없다. 알려진 사실은 평양 출신이고 일찍 가정이 개화한 집안이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학교에서는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생 김애희와 함께 평양 신양리에 있던 리(G.Lee) 선교사 소유의 기역(ㄱ)자형 단층 기와집에서 배웠다고 한다. 김경희는 한국인 교사 송정신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03년 동생 애희와 함께 제1회 졸업생이 된 후 숭의여학교로 진학했다. 졸업 후 동생과 함께 교사로 학교에 남아 학생들에게 수학과 지리를 가르쳤다. 졸업 성적이 좋았던 동생 애희는 4년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학공부에 전념해 의사가 됐다. 귀국 후 평양기독교연합병원에서 활동했고, 광복 후 월남해 숭의여학교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모교인 숭의여학교에서 3년을 가르친 김경희는 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로 부임했다가 다시 평양의 숭현여학교로 부임해 가르쳤다. 1913년은 김경희가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해로 숭의여학교 후배이자 모교 교사였던 황애덕과 함께 숭의여학교 재학생, 졸업생들과 함께 최초의 여성 비밀결사단체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주 1회 구국기도회로 모여 애국가를 불렀고 독립 쟁취 방법을 토론했다. 또 회원들과 함께 마련한 돈을 독립군 운영 자금으로 지원했다. 1919년 2월 김순애에게 중국 상하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듣게 된 김경희는 평양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3월 1일 날이 밝자 감리교인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 직후 평양을 탈출해 중국 망명길에 오른 김경희는 당시 독립운동가 김언경을 만나면서 함께 상하이에서 애국부인회 활동을 시작했다. 김경희의 이 활동은 바로 평양지역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한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의 기반이 됐다.

김경희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수업을 진행하다 1년 만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폐질환에 걸렸다. 1918년 8월 평양으로 귀환하여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 애국부인회의 통합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폐질환이 악화되며 병상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죽어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겠소.”

(2019년 2월 4일 CTS뉴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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