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평지교회 문정욱 목사

올레길 12코스 신도저수지 앞 풍경
올레길 12코스 신도저수지 앞 풍경

샬롬!^^

제주도의 날씨는 맑습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아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기만을 구하며, 또 하루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삶을 낭비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11장 전반부 말씀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에게 한,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하였습니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좋았지만, 막상 현실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 왜 그랬을까? 마르다는 왜 믿지 못하였을까? 그렇게 신앙고백이 훌륭했는데...!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참고하면 마르다는 “일 중심의 사람”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말씀 중심의 사람”인 듯 보입니다. 이 때, 주와 제자들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마르다를 향해 주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르다에게 주의를 주셨었습니다. 즉 마르다의 신앙의 문제를 미리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지만, 마르다는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겠지만,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일보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 결과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할 ‘산 믿음’이 없었고 ‘교리적 믿음’(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었던 듯 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러합니다만 오늘날 많은 열심이 있는 교인들이 마르다형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선순위’(주님과의 일대일의 교제/성경묵상과 기도)를 '빼앗기면', 나중에는 그 있던 작은 믿음마저 '빼앗길지' 모릅니다. 깊이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 본문은 마리아를 따라 예수님께 온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일로 예수님을 믿은 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공회’(로마가 허락한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70여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서,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는 내용과 ‘예수님의 지혜롭게 행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7-53절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7-48절).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자 많은 유대인들이 믿고 따랐습니다. 이 사실이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인들은 이미 유대를 지배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었지만 유대의 주권은 빼앗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이는 거짓되고 위선적인 정치인들이 잘하는 일입니다.

이 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일어나 말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절).

설득력있는 논리적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이는 거짓과 위선이 있습니다. 우선은 ‘전체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죄 없는 한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위험한 전체주의적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인권을 말하는 사람이 인권을 짓밟는 행동을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소위 ‘내로 남불의 행태’입니다.

올레길 12코스 신도리 바닷가 풍경
올레길 12코스 신도리 바닷가 풍경

또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온 백성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죄 없는 희생양을 예수께 적용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희생’이나 ‘섬김’이나 ‘적용’이 없이 그저 유창한 말로 모든 것을 다하려 합니다. 많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고 함정일 것입니다. 희생과 섬김과 순종이 없는 말은 결국 공허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지 않지만, 성경은 그 가야바의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즉 성령께서 그의 입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예언'(미리 말함)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인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대만이 아닌, 온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해석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흩어진 자들이 모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여전히 펄펄 살아 있고 도무지 죽지 않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잠잠한 것입니다.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의 말을 듣고 공식적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53절). 이에 예수님은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근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54절).

“녹슬어 죽기보다 닳아서 죽기 원한다”고 말했던, 18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는 당시 영국 교회에서 설교를 못하게 하자, 교회당 밖 빈들과 광산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 나오지 못하던 많은 빈민들과 광부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었다고 전해집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로 예수님은 빈들의 가까운 에브라임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덕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큰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동쪽 문이 닫히면 서쪽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언제나 복음은 막히지 않고 역사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복음은 역사하였습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놀랍게 일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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