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해자와 피해자
창43:1~45:15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창43:1~2, 개역개정)
그 땅에 기근이 더욱 심해 갔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에,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다시 가서, 먹거리를 조금 더 사오너라.”(창43:1~2, 새번역)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어느덧 거의 떨어졌습니다. 또다시 양식을 구해야 하는데 애굽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도 양식을 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설령 양식이 있더라도 기근이 더 오래갈 것에 대비해 팔지 않고 비축하려 할 테니까요.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애굽뿐이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야곱은 애굽에서 양식을 구해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들들에게 조금만 사오라고 말했지만 ‘조금’과 ‘많이’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미 애굽 총리에게 정탐꾼으로 낙인찍힌 마당에 조금만 산다고 해서 애굽 총리가 눈감아 줄 리 없으니까요.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가지 않고서 필요한 양식만 사 올 수 있을까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베냐민이 애굽에 가야만 했고, 유다가 야곱 설득에 나섭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창43:8~9, 개역개정)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막내를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겠습니다…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창43:8~9, 새번역)
유다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베냐민이 가지 않으면 정탐꾼 누명을 벗을 수도, 양식을 구할 수도 없다고요. 베냐민이라는 분명한 답이 있는데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책임이 자신들은 물론 후손에게도 돌아와 모두 굶어 죽게 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보호한다는 구실로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 야곱의 행동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무책임하고, 다른 가족에게 폭력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죠.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이며 만일 베냐민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죄를 평생 감당하겠다고 까지 약속합니다. 언뜻 보면 42장에서 르우벤이 했던 말과 비슷한데요, 다른 점이 있다면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을 내걸었고 유다는 자기 자신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르우벤의 맹세에 반응하지 않았던 야곱이었지만 유다의 서약에는 반응했습니다. 유다에 대한 신뢰도 한몫한데다 야곱 역시 베냐민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정한 결과였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개역개정)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창43:14, 새번역)
야곱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자식을 잃으면 잃는다’는 표현에서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14절에서 시므온이 ‘너희 다른 형제’라는 표현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앞선 야곱과 유다와의 대화에서 시므온 문제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점이 독특합니다. 그러고 보면 자식을 잃을 각오를 했다는 야곱의 말에도 모순이 있네요. 애굽에 잡혀있는 자식을 구하려는 움직임을 조금도 보이지 않다가 베냐민이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니 ‘자식 잃을 각오를 했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합니다. 시므온이 가족 안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베냐민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야곱은 언제 반대했느냐 싶게 아들들을 보낼 준비를 서두릅니다. 우선 습관대로 선물부터 챙겼습니다. 에서를 만나기 전 각종 예물을 잔뜩 준비해 보냈던 것처럼 애굽 총리에게도 예물을 통해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도했죠. 뭔가를 주고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야곱이 위기 때마다 즐겨 사용했던 방식이었습니다. 곡식 값은 두 배로 준비했고 지난번에 애굽 총리가 돌려보낸 돈도 별도로 챙겼습니다. 이번에 가면 의도하지 않았던 곡식 값 환불도 해명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아들들이 애굽에 가서 총리를 만나니 총리는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그들을 보내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말합니다. 아들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총리가 왜 자신들을 집으로 부른 걸까요? 아마도 지난번 자루에 들어 있던 돈뭉치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래서 요셉 집 청지기(관리인)을 붙들고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무죄를 주장했죠. 청지기를 붙들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