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고향 남해의 산에서 일본쪽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할아버지의 돈궤를 깨는 사고를 치셨습니다. 18살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일본에 도착해서 가내공업 수준의 작은 공장에 들어가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우물가에 가서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낮이면 공장에서 허드레 일을 하고, 밤이면 일본말을 배웠답니다. 그래서 대동아전쟁 중에 군수산업인  피혁공장으로 자수성가해서, 공장낙성식을 했던 사진을 어릴 때 본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올만큼 성공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진주의 은행에서 설립이래 최고액수의 예금주가 되었지만,  패전 후 통장은 휴지로 변했고, 김해에 구입한 50마지기 논은 한 해 농사를 짓기 전에 토지개혁으로, 부재지주인 땅은 국가로부터 몰수당했습니다.  

그 아들인 저는 1978년 남아공화국으로 유학을 가서 8년간 외국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지내다가 8개월 후에는 아내와 두 살, 세 살의 아들과 함께 포체프스트룸이라는 작은 교육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신학석사를 마지고, 설교학으로 신학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유학 5년 차가 되었을 때, 현지 백인목사 한 분이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도 영어가 아닌 아프리칸스로! 하여간 첫 설교를 끝내고 내려오니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목사님,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하늘가나안방언으로 설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초등학교 2학년인 목사님의 딸이 오더니 “목사님, 목사님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왠 엄청난 격려였던지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남은 3년간 50여회의 설교를 했으니 설교학 논문과 함께 설교임상훈련의 기회를 가진 셈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귀국한 아들은 상도초등학교와 고려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삼성에 취직시험을 친다는 아들이 입사시험을 포기를 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아빠, 내가 시험을 치면 내 친구가 떨어져요!” 어안이 벙벙한 말입니다. 난 그런 경우를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뒤에 경력사원으로 그 회사에 다니면서 첫 월급을 받고, 벤처기업에서 받던 액수와 비교가 안되는 많은 월급을 받고 깜짝 놀랐답니다. 많은 월급을 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쓰러져서 119에 실려갈만큼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 회사를 포기하고 유학을 가려는 꿈을 꾸면서 “아빠, 동산, 부동산은요?” “없지~ 왜 지난 번 우리 교회 50주년 희년장학생 모집에 응모하지 않았니?”  “아빠, 한국교회의 부조리 1위는 교회세습이고 2위는 교회 돈으로 자기 자녀 유학보내는 일입니다”  “누가 밀어넣겠다고 했니? 자격이 되면~~ ”  “그걸 누가 믿을까요?”  결국 파리 주재원을 거쳐 구글코리아에 잠깐 있다가 지금은 미국에 간지 10년이 된 것 같습니다.

지난해 7월말 둘째 네가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그 때 형이 전화를 해서 “아들들이 다 외국에 가서 어떻해요?” “괜찮아, 여기도 아들 딸이 많이 남아있어~”라고 답은 했지만, ‘아들은 국내에 있으나 외국에 있으나 큰 차이가 없어’라는 말이 마음속에는 떠올랐습니다. 천하가 다 아는 비밀이니 아들의 명예에 손상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캐나다로 떠난 둘째의 꿈은 “좋은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 하긴 그 꿈은 이루기에는 캐나다가 더 나을 것 같아서 떠나보냈습니다. 길고 추운 겨울을 캐나다에서 지낸 둘째 손녀가 화상통화 중에 느닷없이 질문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가 캐나다에 살아야 하죠” 다시 한 번 생각 정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자기 아빠 엄마의 결정이고 할아버지는 수용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내일 캐나다로 출국하니 그 손녀를 만나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 때는 한참 모든 것이 낯설고, 언어의 스트레스를 한참 받을 때였으니, 하긴 이번에 만나면 질문했던 것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3대의 해외생활은, 한걸음 한걸음 지경을 넓히고, 열방의 축복이 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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