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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들의 날’과 감리교의 영성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11월 1일은 ‘모든 성도(인)들의 날’(All Saints Day)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생소한 날이다. 우리나라 달력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지만 미국 달력에는 11월 1일이라는 숫자 밑에 ‘모든 성도들의 날’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필자가 미국에 유학하여 생활하던 첫 해에는 이 날이 무슨 날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교회에서는 한 번도 이런 교회명절을 지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이 날이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지금도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에 속한 많은 교회들이 11월 1일 직전 주일이나 그 다음 주일을 ‘모든 성도들의 날’ 주일로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전래된 한국 개신교에는 이 날이 없는 것을 보면 매우 의아하다는 생각조차 들곤 했다.

영어 ‘All Saints Day’는 한글로 ‘모든 성인들의 날’ 또는 ‘모든 성도들의 날’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전통을 따르는 필자는 ‘모든 성도들의 날’로 번역하고자 한다. 이런 번역은 특정 성인들만을 지칭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곧 구원받은 거룩한 자, 즉 성도가 될 수 있으므로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성도들의 날은 본래 초대 기독교에서 지켰던 ‘순교자의 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보통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며 9세기에는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죽은 자들의 기일을 늘 기념한곤 했다. 특히 순교자들의 기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순교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이루었으며, 현재도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이 ‘모든 성도들의 날’로 자리 잡게 되었고, 오늘날 서양의 많은 교회들이 이 날을 교회명절로 지킨다.

‘모든 성도(인)들의 날’(All Saints Day)의 성서적 근거

이것은 성서적으로도 근거를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이다.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언급되고 있다. 즉 우리보다 앞서서 살다간 수많은 믿음 조상들이 현재 우리들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으므로 계속해서 신앙의 길을 가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히 12:1). 언뜻 보기에 왜 죽은 이들까지 거론하는가 하고 의아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죽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과거의 신앙 전통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신앙을 가능케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기독교 이전의 수많은 신앙의 조상들을 자신들의 과거요 뿌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인)들의 날’(All Saints Day)의 신앙적 전통

이렇게 죽은 성도들을 생각하는 전통은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들이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 보면 ‘성도들의 교제’(communion of saints)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 구절은 원래 초대 교회에서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과 이미 죽은 성도들과의 교제를 의미했다. 곧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교통함을 의미했다. 이 성도들의 교제는 초대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다시 말해, 성도들의 교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장소들 중의 하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죽음이 기독교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성도들의 교제를 분열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8).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가 그린 “성인들”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가 그린 “성인들”

바로 이런 전통이 종교개혁이후에는 바뀌게 되었다. 즉 모든 성례전적 전통이 축소되었고, 성도들의 교제는 기존의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1,500여년간 내려오던 기독교의 전통이 개신교라는 새로운 전통을 통해 단절되고 축소되고 만 것이다. 물론 당시 부패한 가톨릭의 교권에 항거하여 새로 개혁된 기독교를 만들다 보니 이런 단절과 축소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한 기독교 역사상 죽은 성도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많은 예들이 있다. 3세기에 기독교 교회는 죽은 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만찬을 행하곤 했다. 이것은 산자와 죽은 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떼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예식은 순교자들을 위해서도 행해졌다. 게다가, 주일날 거행하는 성만찬에서도 죽은 성도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초기 기독교에서 시작된 죽은 자들에 대한 예전은 성인숭배(cult of saints)와 연관되어 광범위하게 발전되었다. 초대 교회는 죽은 성도들을 찬양하고 모방하기도 했고, 성도들의 무덤 앞에서 축하와 기도의 모임을 드리곤 했다. 기독교가 시작된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인간과 신이 접촉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덤을 성인(성도)들이 들어가는 특권적 장소로까지 생각했으며, 성인들 역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중재자로서 간주되었다

물론 기독교 역사상 성인숭배와 그들이 행하는 중재역할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성인들의 중보를 부정했으며, 성인숭배를 교외에서 금지시켰다. 왜냐하면 성인들에 얽힌 온갖 종류의 전설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부패한 가톨릭을 향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상황에서 타당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삶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중요한 상징들과 예전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역할도 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전은 가장 빈약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때문에 현재 많은 교회들이 사라진 전통과 상징의 복원 및 비판적 수용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교제’에 관심 가져야

현재 한국 교회는 찬양, 통성기도, 말씀 중심의 보다 단순한 예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유형의 예배가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영성이 보다 깊어지고 넓어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사라졌던 여러 전통들을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성례전성(sacramentality)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예배를 갱신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특히 ‘성도들의 교제’라는 사라진 전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전통이 서구에서는 ‘모든 성도들의 날’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한국 교회의 절기력에서도 이 날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에게, 성도들의 교제라는 전통은 믿음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을 존경(veneration)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고,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성도들 또는 성인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는 신앙적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세 시대에 성행했던 복잡한 성인숭배와 이에 얽힌 교리를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생전에 ‘모든 성도들의 날’을 항상 존중하고 축하했다. 1767년 11월 1일자 일기에서 웨슬리는 모든 성도들의 날을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축제”(a festival I truly love)라고 표현했으며, 1788년 11월 1일자 일기에서도 모든 성도들의 날을 “나는 언제나 편안한 날로 생각한다”(a day that I peculiarly love)라고 기록했다. 물론 가톨릭의 예전을 상당 부분 수용했던 성공회의 사제였던 웨슬리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가 이 날을 너무도 중요하게 지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감리교인들 역시 당연히 이 날을 중요한 절기력으로 지킬 때 참다운 감리교의 영성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연합감리교회에서는 지금도 이 날을 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간주하고 축하하고 있다. 미연합감리교회 공식 웹사이트(umc.org)는 이 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모든 성도의 날은 신앙 안에서 살다 간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를 의미한다. 모든 성도들의 날은 우리의 역사, 즉 연합 감리교인들이 교회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을 축하하는 때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성경, 전통, 체험, 이성, 토착문화 라는 다섯 가지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그중 두 번째가 전통이다. 즉 2,000여년간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직은 낯설지만 ‘모든 성도의 날’과 같은 전통을 다시 발굴하고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감리교의 신앙과 영성을 좀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성도들의 날’의 의미, 감리교회가 계승해야

‘모든 성도들의 날’은 이미 앞서간 성도들 모두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가능케 해주는 중요한 절기이다. 바로 이 날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과 사랑을 함께 나누게 되는 공동체,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속한 성도들의 불가시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에큐메니컬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날을 통해 현재의 성도들은 과거의 뿌리와 연결되고, 이런 관점에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해마다 각 교회들에서 ‘모든 성도들의 날’을 기념하여 드리는 기도를 통해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은 이 날의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우리 한국 교회, 특히 감리교회에서도 이렇게 될 날을 소망해본다.

“영원하신 하나님, 이 날 우리보다 앞서 가신, 구름떼 같은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저희가 기억하게 하옵소서. 모든 시대, 모든 세대들에서 삶과 죽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증언했던 자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용기를 내고 희생했던 모든 자들, 고통과 박해와 죽음을 감수하며 형제자매들을 위해 봉사했던 자들, 영광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저 세상으로 가신 모든 자들, 이 모든 자들을 저희가 기억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당신과 함께 했던 사람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들의 주인공들, 이들 모두를 저희가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들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저희들이 고귀한 신앙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그래서 그들의 불가시적 현존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모든 성도들의 날 드리는 기도문 중 일부, Chalice of Worship,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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