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의 가을
섭지코지의 가을

창조

창1:2~2:3

이제부터 창세기 1장 2절부터 이어지는 본격적인 창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개역개정)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1:5, 새번역)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성경은 이 과정을 7일로 나누어 각각의 날에 무엇을 창조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죠. 사실 어느 날 무엇을 창조하셨는지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넷째 날에 창조되었는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는지가 중요한 지식은 아니니까요. 다만 이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드셨는지를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는 7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되니까요.

창세기 1장에 제시되어 있는 7일 동안의 창조 과정을 읽어보면 매우 규칙적이면서도 질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과정이 하루 단위로 끊어서 진행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네, 하나님은 완벽한 하나의 그림을 조금씩 단계를 두어 만드신 것이죠. 만화나 영화에 등장하는 마법사들은 뭔가를 만들 때 단계를 거쳐 만들지 않습니다. 요술봉을 휘두르거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완성된 작품이 갑자기 나타나니까요.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었을까요? 물론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단계적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심은 물론 그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사람이 그것을 깨닫고 믿음을 가지길 원하시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듯 7일 동안 단계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창세기의 섬세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완벽하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날,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에 빛을 비춰주셨죠. 빛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밝음과 어둠이 나뉘게 되었고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공간이 나누어짐은 물론 밝음과 어둠이 순환하는 시간의 질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이 지음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창조 과정이 곧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었음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빈틈없는 설계고 다른 하나는 질서가 유지되게 하는 지속적인 의지일 겁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이 두 가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매우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계시는 섭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요.

둘째 날에는 물을 하늘(궁창, 창공)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셨고 셋째 날에는 하늘 아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셔서 육지와 바다를 구분 지으셨죠. 이 날 육지에는 각종 식물이 자라게 되었고요. 넷째 날이 되면 해와 달, 별을 만드셨고 이들이 움직이도록 하셔서 낮과 밤, 한 달, 일 년 등의 시간 순환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후인 다섯째 날에 물과 하늘에서 살아가는 각종 어류와 조류가 창조됩니다. 이들이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각종 식물들과 기후 환경이 이미 갖춰진 상태니 어류와 조류가 번성하게 됩니다. 여섯째 날에는 이렇게 번성하게 된 식물과 조류, 어류들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나타났고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릴 존재로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 하나님이 안식함으로써 창조 과정이 끝나게 되죠. 하루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나타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표현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신 세계를 다시 한 번 검증하고 평가하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네요.

창조 이야기를 읽으며 놀라게 되는 또 한 가지는 이토록 장엄한 스토리를 어떻게 이런 평범한 단어들과 문장으로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 쓰인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생각도 듭니다. 창조 이야기는 매우 직관적입니다. 어린아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분명하게 쓰였죠. 문제는 이토록 분명하게 쓰인 구절들을 읽으면서 불필요한 잣대로 평가하고 분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누구나 궁금한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루가 우리가 아는 24시간이 맞나?’, ‘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빛이 어디서 왔지?’, ‘둘째 날 물을 나누시는데 물이 언제 만들어져 있던 거야?’와 같은 여러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죠. 안타깝게도 창세기는 이런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원래부터 그렇게 창조되었으니 그저 그렇다고 말할 뿐이죠.

창조 이야기는 신비로운 스토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섭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참고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완전하게 충족시켜주지는 못하죠. 읽어도 의문점이 남고, 어떤 것들은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이 검찰이 법정에 제시한 증거물이 아닌 이상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총동원해 세세하게 검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단 하나거든요.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과학적, 철학적 논쟁들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독서를 계속하도록 하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개역개정)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새번역)

여섯째 날에는 사람이 창조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1장 26절은 여러모로 특이합니다. 우선 다른 창조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계획된 그대로 진행되는 듯 물 흐르듯 착착 진행되었는데 유독 사람 창조 이전에는 굳이 ‘이제 사람을 만들어야겠다.’라는 언급을 한 후에 창조가 진행되었거든요. 왜 이런 언급이 들어갔을까요? 더구나 ‘우리’라는 복수형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보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등 세 분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것에 관련된 회의를 했다는 뉘앙스를 줍니다. 왜 ‘우리’가 모여 이런 합의를 하고서 사람을 만든 것일까요? 동식물들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면 되는데, 왜 굳이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걸까요?

이 구절은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창세기라는 책의 존재 자체가 사람을 위한 것이죠.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구상하신 최초의 그림대로 만들어졌을 뿐이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에 더해 특별한 계획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어떤 형상을 따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디자인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그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결과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유 없이 자신의 형상을 주었을 리가 없습니다. 자기 형상을 줄 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이며,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기에 모두가 함께 사람을 만들기로 결의하신 것이겠죠. 성부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고, 성자의 사랑과 희생으로 생명을 주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은총을 주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은연 중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토록 크게 받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주고 계시기도 하고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반대 방향의 적용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하니까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천정화 [천지창조]에 하나님의 모습을 그린 미켈란젤로는 어디에서 그 형상의 힌트를 얻었을까요? 당연히 사람입니다. 위엄 있고, 엄숙하며, 사랑이 많고, 정의로우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절대자를 묘사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그런 속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며 하나님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1장 26절은 단순히 인간 창조의 과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고, 나아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모습 안에서 참된 그분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개역개정)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창1:31, 새번역)

여섯째 날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처음으로 ‘심히’(‘참’) 좋았다고 하십니다. 어쩐지 이 부분에서 그간 미소만 짓던 하나님이 크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이렇게 창조의 설계는 실제 세계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하지만 인간을 만들었을 때의 계획은 아직 실현되기 전이죠.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실 것입니다. 이후에 보게 될 창세기의 수많은 이야기들과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이를 증명하고 계시죠. 하지만 창조 자체는 이것이 마지막이었기에 하나님은 안식을 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개역개정)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2:2, 새번역)

하나님의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도 쉼이 필요하다는 점은 어쩐지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전능한 신이고 시간과 공간을 모두 뛰어넘는 분이라면 그런 것은 필요치 않을 것 같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막연히 느끼는 절대자의 개념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때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의 이미지에 인간이 만들어낸 절대자의 이미지를 덧붙이곤 합니다. 신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분이며, 그가 할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고, 엄중한 그분의 힘 앞에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생각은 사실 기독교적 하나님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람의 선입견에 더 가까운 것이죠. 창세기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더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곳곳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죠. 시작하고 끝을 맺으시는 하나님, 안식하시는 하나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시고, 우주를 창조하시되 작은 생명이 살아가는 환경까지도 고려하시고, 계획을 다 이루시고 나서는 참 좋다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창세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토록 자세하게 하나님의 면면을 보여주는 창세기는 정말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그분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된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특히 안식이 그렇죠. 일곱째 날의 안식을 혹자는 ‘하나님이 쉼이라는 개념을 창조하셨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공감은 가는데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일의 연장으로 쉰다고 하면, 다시 말해 휴식이라는 이름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끔찍한 일도 없겠죠. 쉴 때는 그냥 쉬어야 합니다. 여섯 날 동안의 창조를 마치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의 성취에 그 어떤 부족함이 있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날의 창조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했으니까요. 그러니 쉬기 원하신 하나님이 그 다음날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셨다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수많은 계획과 걱정, 신경 써야하는 일들에 파묻힌 채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우리들의 삶에 이런 쉼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완전히 손을 떼고 쉬셨던 하나님이 부럽고 멋져 보입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은 그 다음 날 하나님이 쉬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즉, 오늘날의 일요일이 일주일의 첫날인 것처럼 사람의 첫날이 하나님의 쉼으로 시작한 셈이죠. 섭리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세계와 하나님의 쉼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어렴풋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천지 만물이 거룩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잘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 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부담은 그로 하여금 오히려 쉼에서 멀어지도록 작동하게 되겠죠.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온전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해야 할 일들과 누려야 할 것들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니까요. 아마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쉼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원인일 것이고요. 사람이 과연 자기 힘과 의지로 참된 쉼에 이를 수 있을까요? 결국 참된 쉼을 누리고자 한다면 진정한 쉼을 누리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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