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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요나1장 1절~3절

 

 

1. 이방인을 위한 예언자, 요나


① (1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요나서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소위 ‘고래(?) 뱃속에 머문 요나’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요나서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별 관심이 없다. 요나서를 전체적으로 숙고하며 읽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서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구사일생의 신기한 기적을 전하는 책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요나서의 주제를 ‘요나의 표적’,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요나보다 더 큰이’라는 핵심문장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예표 하는 사건으로 명료하게 해석한다. (눅11:29) ‘무리가 모였을 때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니라...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누가복음이 전하는 ‘요나의 표적’은 요나서가 전하는 본래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열쇠다.



2. 유대에서 땅 끝까지


②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요나가 예언을 선포하는 대상지역인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다. 니느웨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요나서의 주제는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이다. 요나서는 ’구약 중에 신약‘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한계를 넘어 온 세상과 전 인류에게 확장되는 사건을 전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방인의 사도’였다. (갈2:7~8)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팔레스타인에서 전 세계로,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선교적인 지경이 확장되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지만, 당시에는 매우 부적절하고 실현 불가능한 생각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 (3절) ‘욥바로 내려갔더니’ 욥바는 지중해로 가는 대표적인 항구다. 공교롭게도 신약성서에도 ‘욥바’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이 나온다. (행전10:28, 34) ‘이르되 유대인으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방인이나 죄인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까지, 교회와 기독교인을 넘어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까지, 아니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며 손가락질 하는 죄인들까지 구원하신다. 믿거나 말거나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의지다.



3. 이방인의 구원


③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쳤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다. 왜 그랬을까? 불순종 자체보다 불순종한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요나서가 전하는 핵심메시지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앗수르의 수도)는 이방인이자 적대국이었다. 이방인의 구원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공의라고 확신했던 요나에게는, 죄악이 만연했던 니느웨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었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처분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 생각인가?, 누구의 판단인가?, 누구의 정죄인가?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이 달랐다.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순종은 내 생각과 내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다. 순종은 내 길보다 하나님의 길이 더 좋은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만 할 수 있다. 요나서의 핵심은 요나의 판단, 요나시대의 유대인들이 사고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요나서의 주제는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확장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증거 한다. 구원의 조건은 외적인 혈통이나 소속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통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 (눅4: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에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스스로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에 대한 책망이자 경고의 메시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의 작사가로 알려진 존 뉴턴은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말한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아서 놀라고, 도저히 천국에 못 갈 것이라고 혐오하고 정죄했던 이들이 와서 놀라고, 이 땅에서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자부하던 이들이 천국에 못 와서 놀라는, 참으로 놀라운 대반전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21절 이하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결론이기도 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4. 요나의 표적 밖에는


④ (눅10:13~14)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예수께서는 구원의 조건이 혈통이나 직분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통한 구원뿐이다. 요나서의 주제는 이방인이던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을 통해서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만도 못한 유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나지금이나 불신자만도 못한 신앙인, 타종교인만도 못한 기독교인, 평신도만도 못한 목회자, 집사만도 못한 장로가 많다. ‘이방인의 구원’은 낡은 생각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메시지다. 거룩한 직분(감독, 목사, 장로 등)을 가졌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특권을 가진 게 아니다. 누구든지 회개치 않으면 지옥에 간다. 더러운 죄인이라고 무조건 지옥행이 아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 모태신앙, 3대째 기독교집안, 신학교출신, 30년 신앙생활, 유명한 교회 다닌다는 외적인 조건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거룩한 직분이나 부여받은 역할에 합당한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요나의 표적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직분이나 연조를 자랑하거나 공로를 자랑하거나 안주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과 삶인지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더불어 비록 지금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이거나 최악의 형편에 놓인 구원받을 가능성 ‘제로(zero)’의 씻을 수 없는 죄인일지라도 함부로 정죄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이방인과 죄인에게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누구든지 개과천선하여 진정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길을 예수께서 열어두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요나의 표적’이다. 구원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의 은혜’이고, ‘외모’가 아니라 ‘중심(믿음)’을 보시는 까닭이다. 이것은 요나서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본래적인 가르침이자 사도바울이 목숨을 걸고 온 세상에 전한 복음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을 주창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신이기도 하다. 요나가 전하는 복음 앞에서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를 따지는 건 진부하고 한심한 논쟁일 뿐이다. 다만 오늘날 ‘교회 안에 구원이 있는 지, 과연 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기에 합당한 삶인지’ 날마다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진정한 회개가 요구될 뿐이다. “너나 잘해~!”,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오래전 남포교회 원로이신 박영선 목사가 내걸었던 교회표어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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