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산 가운데의 두 나무 2
창3:10~3:24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개역개정)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3:10, 새번역)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이 깨어진 것은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이 범죄한 것을 알게 되신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는 규칙을 어겼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음을 두려워하기보다 벗고 있는 자신이 두려워 숨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 세 번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정상적인 대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 가장 큰 문제여야 하잖아요? 아담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리고 하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있습니다. 내 부끄러움, 내 잘못, 내 두려움, 내 생각, 내 입장.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 없이 사람과 사람이 연합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던 과거의 아담을 생각할 때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요?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된 것은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죄를 범한 자신에게로 생각과 마음이 함몰되고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 때문에 나를 창조하고 생명을 주신 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큰 원인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13, 개역개정)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창3:12~13, 새번역)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사건의 경위를 물으실 때 이들의 대답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대답하고 하와는 뱀이 꾀었다고 대답하죠. 언뜻 보면 틀리지 않은 대답 같지만 틀렸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우리의 자녀가 범했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원할까요? 누가 줘서 먹었는지가 궁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부모라도 자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해야 할 대답은 팩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했다는 인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감정적으로 단절된 결과는 이렇게 큽니다. 게다가 아담은 은근히 하나님께로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요. 규칙을 어긴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규칙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네요. 이미 아담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대답은 일정 부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도 먹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에는 전혀 잘못이 없고 뱀이 부추겨서, 여자가 주어서 먹은 행동만을 잘못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한참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 그저 열매를 먹는 행동만을 규제하려는 것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먹지는 않고 냄새만 맡으면 괜찮나요? 입에 넣었다가 삼키지 않고 뱉으면 문제가 없나요?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동기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되 너희가 절대자의 피조물임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입니다. 명령의 내용이 무엇이건 그것이 창조자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죠. 단순히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친구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고 하니까 떨어진 물건을 주웠을 뿐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치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6~17, 개역개정)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3:16~17, 새번역)
사람과 뱀은 이제 죄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뱀에게는 사람과 달리 왜 이런 일이 했는지 아예 묻지 않으시고 바로 벌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유혹한 뱀의 행동이 구속사라는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고, 뱀은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확인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게 되었고 미래에 오실 여자의 후손 예수님으로 인해 심판 받게 되는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16절과 17절에서 나오는 여자와 남자의 벌은 뱀이 받은 벌과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언뜻 고통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축복이 함께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16절과 17절을 보면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는 노동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노동이 남성의 전유물도, 출산과 육아가 오롯이 여성만의 몫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 이 두 구절은 인간 모두에게 함께 내린 벌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에덴동산에서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노동의 수고와 다음 세대의 양육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모든 것을 거저 얻어 마음껏 누릴 수 있었고 오로지 자기 삶만을 생각하고 살아도 좋았던 에덴동산의 삶과는 정반대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사람은 이제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을 것입니다. 에덴을 나와 잡초가 가득한 땅에 서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이들의 표정이 어땠을지 자못 궁금하네요.
하지만 출산과 노동은 한편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출산은 직접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이고 노동은 그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살려내는 일이니까요. 또한 이를 통해 가정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로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이제 남편과 아내로, 아빠와 엄마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살아가게 되었고 낙원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고통과 수고의 짐을 지는 것과 동시에 행복과 성장의 기쁨도 맛볼 수 있게 되었죠. 뱀과 사람에게 주어진 벌의 차이점이 있다면 뱀에게는 벌의 결과만 있었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감정적이었지만 하나님의 대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한 단계 더 진행시켰으니까요. 인간이 에덴동산의 규칙을 잘 지켜 오래도록, 혹은 영원히 그 안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은 그 또한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규칙 지키기를 거부한다면, 그래서 그 결과로 에덴 밖에서의 삶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도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었고요.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인간에게 성장이라는 축복을 준비해 주신 것이죠. 성장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처럼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간되지 않은 밭은 갈고 또 갈아서 조금씩 수확량을 늘려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작고 약한 갓난아기를 돌보고 또 돌보며 오랜 시간 기다려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고요. 한 세대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세대가 남긴 것을 다음 세대가 받아 누리다가 또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해 역사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지혜도 점차 성장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성장은 어디에까지 이르는 것일까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개역개정)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새번역)
성장이라는 과제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 생명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굳이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에는 생명이 언제나 사람에게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도전했고, 에덴동산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열매를 먹어 눈이 밝아진 사람은 이제 그 눈으로 자신들의 지혜를 발전시킬 것입니다. 학문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일으키고,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게 되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든 시도가 충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뱀의 말과는 달리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쌓여도 결코 하나님의 지혜처럼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를 쌓아가는 길을 허락하셨죠. 다만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 생명만큼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도록 막으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 생명의 영역에까지 이를 것을 잘 알고 계셨으니까요. 인간은 자신들의 지혜로 생명의 신비를 보는 눈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생명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불칼로 지켜지고 있는 한에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 대신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을 만들고 뱀이 사람과 함께 살도록 허락하시기 이전에, 사람을 창조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하기 이전에,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참된 구원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열쇠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비로소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영원한 생명과 참된 지혜,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벽한 연합이 있는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의 삶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