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로 가는 길에는 2천미터 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때로는 더운 날씨에도 산꼭대기에 하얀 눈이 보입니다. 고갯마루에는 카페가 있습니다. 큰 커피 기계에서 옛날 증기기관차에서 나던 김빠지는 소리가 치-익하고 납니다. 김이 촤악 퍼집니다. 자그마한 컵에 진한 커피가 흘러내립니다. 카페 솔로, 카페 꼬르따도, 카페 콘 레체.. 분위기 최고, 커피 맛 최고입니다. 두어 차례 지나갈 때마다 들렀습니다. 얼마나 그 커피 이야기를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끔씩 그립습니다. 솔직히 정확한 맛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최고의 맛으로만 기억납니다. 사실 추억이 최고의 맛이겠지요.

이태리에서 성악 공부를 마친 젊은 부부가 브뤼셀로 올라왔습니다. 남편은 에스프레소 마니아입니다. 그는 에스프레소 주전자(?)에 수동식으로 끓입니다. 주전자 꼭지로 커피 진액이 뚝뚝 떨어집니다. 커피 한 잔 하는 것이 무슨 의식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그 주전자를 제게 선물했습니다. 몇 번 사용해보니 마음먹은 대로 잘 나오질 않기에 한쪽 구석에 모셔 놓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 주전자는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마셨던 그 유명한 이태리 커피 상표는 잊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전 광주에 카페 구경하기 힘들 때였습니다. 여수 있는 친구에게 놀러 가서 유명하다는 바닷가 카페에 갔습니다. 앉은 자리 옆 발밑으로 바닷물이 찰랑거립니다.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좋은 위치입니다. 카페 진열대에 사모하던 바로 그 이태리 커피 상표가 눈에 띄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걸로 에스프레소 끓여주는지 확인하고 한 잔을 시켰습니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했습니다. 최대한 아껴가며 홀짝거리는데 매니저가 와서 한 잔을 더 주겠답니다. 에스프레소 시키는 손님이 한 달에 한 명 정도뿐이라 반가워서 서비스랍니다. 이런 횡재가, 당연히 땡큐했습니다.

그리스에 유학 가서 그리스 아내와 결혼하고 지금은 대학교수로 있는 젊은 성도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리스에서 에스프레소 잔 세트를 사와서 선물했습니다. 까만 바탕에 금테를 두른 예쁜 잔이었습니다. 그 잔을 사용할 기회는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의 아끼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잔은 몇 년째 찬장 속에서 제게 쓰임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는 주일이면 카페가 가동됩니다. 카페에서 쓰던 커피 기계를 얻어 와서 70만원 주고 고쳐 사용합니다. 전문 바리스타 여집사님이 커피를 끓여줍니다. 자기 카페에서 사용하던 잔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에스프레소 잔도 두 개 있습니다. 주일 점심 식사 후에는 꼭 한 두 잔 마십니다. 두 잔 마시면 100프로, 한 잔 마시면 80프로 정도 졸음 방지 효과도 있습니다. 오전으로 설교를 다 마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저는 설탕을 탑니다. 스푼으로 긁어 떠먹는 쓴 맛과 단 맛이 합쳐진 마지막 끝 맛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벌써 다 마셨나 하는 아쉬움을 늘 느낍니다.

교인들과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우린 너무 편안하게 사는 것 같아. 예수님은 커피도 못 마셔보셨을 텐데.” 제 마음속에는 상상의 날개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왠지 양이 많은 아메리카노보다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물욕(^^)도 없으실 테니.. 저처럼 설탕을 넣고 끝 맛을 즐기실 것 같습니다. 저처럼 아쉽게 잔을 내려놓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죄송하고 참 감사합니다. 그분의 은혜로 살고 그분의 은혜로 행복해하면서, 그분을 아예 잊어먹고 있을 때가 너무 많으니.. 주님 저랑 에스프레소 한 잔 어떠세요? 그 고갯마루의 카페, 여수 바닷가의 카페, 아니면 지금 우리 교회 카페에서요. 주님의 대답이 들립니다. 전목사, 너 제법이다. 내 기분을 다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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