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어찌 한 페이지로 기록할 수 있을까? 고통뿐인 자신의 삶을 보며 스스로를 ‘고통의 종’이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고통의 종’이 아닌 ‘긍휼의 종’이라 칭하시며 끝이라 생각하는 순간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는 소망의 시작임을 알리는 사명자로 지현호 선교사를 세우셨다. 하나님의 선하신 공식 안에서 그 여정을 기쁨으로 지나는 올리브선교회 공동대표 지현호 선교사를 만나본다.

3대째 기독교 집안 모태신앙으로 자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앞에 삶의 소망 모두 사라져
| 삶의 시선
Q. 자신의 삶을 왜 고통이라 여겼나?
나는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장로님으로 섬기셨고, 어머니는 선교사이시며 나는 그 신앙을 이어 받은 3대째 기독교인이다. 어린 시절 나는 경찰이셨던 아버지가 참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나에겐 언제나 커 보이던 아버지가 일하시던 중 쓰러지셨고 간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 6개월 동안 간 치료를 받으셨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아버지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결국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고 대학병원 검사 결과 아버지는 뇌종양 말기로 판명되었다. 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의사의 오진이었다. 자신이 뇌종양 말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아버지는 이미 마지막을 예감한 듯 유언처럼, “내 한 평생 바라는 소원 없이 잘 살다 가오, 그런데 내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형님네 식구들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꼬!”라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에게 처음으로 보인 아버지의 약한 모습이었다.
세 차례에 걸쳐 뇌 수술을 받은 아버지는 항상 가족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던 든든한 모습과는 달리 벙어리에 한쪽 다리와 팔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이 기간은 2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가 집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나와 동생은 학교 마침 종이 울리면 언제나 집으로 달려갔다.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는 것도 나는 그저 행복했다. 그러다 어머니와 함께 함께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서 ‘40일 새벽작정기도’를 하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38일째에는 갑자기 너무나 배가 아파 방에서 뒹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님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약속은 지키자며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것을 권면했다. 도저히 배가 아파 어머니를 의지하지 않고는 교회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그 당시 170cm였던 나를 업고 교회에 나가셔야만 했다. 신기하게도 예배 후 배가 깨끗이 나았고 나의 배를 낫게 하신 하나님께서 40일이 지나면 우리 아버지도 회복시킬 거란 기대에 기뻤다. 40일이 지나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마침 그때 맹장 수술을 받았던 동생을 간호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다.
내 고통은 계속되었다. 1993년 어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이렇게 말씀했었다. “큰 외삼촌이 신장이식을 하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기증해야겠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큰 외삼촌께 신장을 주라고 하시는구나.” 동생은 울었고 나는 그때 절대로 안 된다며 반항했다. 더 큰일을 저질러야만 어머니께서 포기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소주 댓 병을 사서 다 마셨는데 얼마나 마셨던지 피까지 토하며 거의 1주일을 일어나지 못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님은 참 많이 우셨다. 그런 나에게 한약을 지어주시며, “현호야! 너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소중함을 알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서울로 수술하러 떠나버렸다. 수술 후 40대인 어머니는 60대의 할머니처럼 보였다. 한 손엔 지팡이를 의지하며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 담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어머님은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했다. 2년 동안 어머니의 아픈 모습을 보며 내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분노가 더욱더 커져만 갔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집사인 어머니가 지팡이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며 “권사님!”이라고 부르는 성도들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머님은 “저는 집사이고 40대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농담 잘하시네요!”라고 말을 하곤 했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정말 내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내 아픈 마음을 아시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1997년 드디어 우리 집에는 정말 기쁜 일이 생겼다. 공부와는 멀어 보였던 동생이 1년 동안 삭발을 하고 책상 앞에 “I CAN”이라는 문구를 붙이며 열심히 공부하더니 일반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입학이 결정된 날 동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저에게” 형! 나도 형처럼 공대에 입학해서 자격증도 따고 돈도 많이 벌어서 어머니 호강시켜 드릴 거야! 형! 우리 정말 열심히 살자!”라고 힘차게 말했었다. 그리고 동생은 대학 입학식 날 멋진 양복을 입고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집을 나섰다. 그날 밤 12시, 귀가하지 않는 동생을 걱정하고 있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형님! 현웅이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보호자가 필요하니 지금 오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한 나에게 의사는 차트를 보여주며 동생의 상태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 이내에 생을 달리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응급실 여기저기 동생을 찾았다. 도저히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한 청년이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을 축하하며 선물해 준 양복을 입고 누워있었다. 피가 잔뜩 묻어있는 침대에 ‘지현웅’ 내 동생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동생은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대학로에서 싸움이 붙었고 잠시 넘어진 순간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차량이 동생의 머리를 바퀴로 깔고 지나갔다고 했다.
두 살 터울이었던 동생은 내게 좋은 친구였고 마음을 나누고 기댈 동역자였다.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1시간이 지나자 동생은 내 곁을 떠났고 나는 허망함에 응급실에서 짐승처럼 울어댔다.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너무 잔인했다. 화장터에서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는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보였다. 원래 슬픔이 큰 사람은 멍하니 쓰려져 있고, 조금이나마 힘이 있는 사람은 짐승같이 부르짖는다. 동생을 잃은 나의 심정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충격과 슬픔이 더 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더 서로를 의지하며 열심히 살았었는데 한 줌의 재가 돼버린 동생을 보니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자신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었던 것은 동생의 죽음이 음주운전했던 사람, 그리고 동생과 술을 먹고 싸웠던 사람 때문인 것을 나중에 검찰 조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을 죽인 자들을 모두 죽이고 나도 자살하고 싶었다. 내 인생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홀로 남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께서는 이러한 큰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기도하며 울며 하나님께 매달렸었다. 때로는 기운이 없으신 모습으로 누워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는 액자를 보며 “하나님 제 마음 아시지요..?”하며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복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화를 풀 수가 없어 매일 술만 마셨다. 매일 소주 7병에서 8병가량을 마셨다. 거의 알코올 중독자가 다 되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일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권유로 찾아간 1:1 제자 훈련
본인이 죽어서라도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분, 그것은 ‘진심’이었다
행함이 있는 긍휼의 사람, 홍기일 목사님
Q. 당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얼마 후 군대 입대 영장이 나왔다. 분명히 군대에 안 갈 수 있는 방법이나 방위, 공익으로 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를 도와주지 않으셨다. 매일 술에 취해 지내는 것보다 입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면서 입대 전 교회에서 일대일 양육을 받아 보라고 권면하셨다. 속으로, ‘어머님은 내 삶에 도움이 안 돼! 군대 가는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나에게 고통을 안겨줬던 교회에 나가라고 하다니 정말 기가 막히게 힘들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하나뿐인 어머니의 간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가득 찼던 나는 ‘누가 나를 가르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내가 물어볼 테니까 누구든지 걸리기만 해봐라! 다 죽여 버릴 거야!”라고 생각하며 양육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나를 가르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다시 한번, ‘거봐! 아무도 없지?’라고 생각하고 지내던 중 갑자기 전화가 왔다. 젊은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직접 양육하겠다는 것이었다. 교회[광주 월광교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홍기일 목사님이라는 분이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분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새벽예배 마치고 가장 늦게까지 교회에 남아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분은 분노에 차 있는 나를 보더니 아무 말씀도 어떤 가르침도 없이 그냥 나를 꽉 껴안고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형제의 고통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 형제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평안을 주시옵소서. 아버지! 현호 형제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가 죽어서 이 형제가 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여 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때였다. 난 내 눈에 눈물이 흘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술주정뱅이에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고함치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찌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울어주고 죽겠다고 기도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진심으로 기도하는 목사님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버렸다. 동생을 잃은 뒤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거의 반년 만에 그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목사님의 품 안에서 한없이 울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일대일 양육 시간이었다.
말씀이 내 삶에 임할 때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전 재산 50불, LA갈비를 만들어 유학생들 섬겨
Q. 삶의 굴곡 가운데에도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 자녀의 삶은 매 순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지만 특별히 선교사의 삶은 더욱 그런 것 같다. 2005년 8월, 당시 나는 캐나다에서 유학 중이었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매일 입덧하는 임산부와 같이 아침마다 헛구역질을 하고 또한 재정은 거의 바닥이었다. 어느 날 성경 통독 3독을 하면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기도하며 열심히 3독을 마쳤다. 3독을 마치면 영안이 열려서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축하해 줄 그런 모습도 기대했었다. 그리고 내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도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은혜가 부어지며 마음이 뜨거워지고 한없는 감사가 넘쳐났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이 진리의 말씀이 실제로 임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뜨거워졌고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내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연약한 저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이런 기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감격을 누리고 나서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헛구역질하며 괴로워했던 시간이 나에게서 떠나갔고 또한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싶고 마음에는 평강이 가득했다. 그 후 하나님을 간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당시 가진 재정 50불로 유학생들에게 LA갈비를 대접하며 전도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재정의 어려움과 육체의 고됨 속에서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식사로 섬겨주었다. 식탁 교제를 나누며 내 삶의 간증과 복음을 증거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영접하지 못한 영혼들을 두고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했다. 성령님의 탄식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큰 아픔을 느꼈다. 이 아픔은 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보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이 아픔을 느끼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할 때 비로소 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아! 우리 아버지는 나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바라보고 계시구나! 우리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 전했다.

고린도후서 6:9-10 (표준새번역)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얼마 후 갑작스럽게 대기업 해운회사에서 근무하시는 이모부가 찾아오셨다. 임신한 아내를 보더니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싶다며 제일 비싼 80달러 코스요리와 랍스터를 사주셨다. 음식을 다 먹을 수 없어서 남은 음식은 싸와야만 했고 헤어지기 전에 용돈이라며 500달러를 헌금해 주시고 갔었다. 멀리 밴쿠버까지 오셔서 조카를 챙겨주는 이모부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날 밤 기도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이모부를 통하여 위로해 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마치 ‘사랑하는 내 아들, 내 딸아 정말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아! 정말 잘했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 사역의 시선
주의 종들을 섬기는 사역, 선교사 안식관
중보기도자 각자의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연합사역, 통일 다음 세대 가정 세우기
Q. 올리브선교회 사역을 소개한다면?
‘올리브’선교회는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는 비전을 갖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에 중점을 두고 세 가지 사역을 하고 있다. 첫째 선교사 안식관 사역, 한국으로 돌아와 나 또한 가족들과 선교사 안식관에서 지내며 많은 중보기도자들로부터 사랑의 섬김과 기도의 동역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게 “주의 종을 깨우라”라는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외침으로 깨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으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님들이 새 힘을 얻어 돌아가는 것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 둘째 중보자들의 회복, 중보기도자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이 수고는 하나님만이 알아주신다. 제대로 공급받지 않으면 중보자들이 지치고 넘어져 각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서 올리브선교회는 매주 목요일 ‘느헤미야 목요 중보기도모임(현재는 온오프라인으로 동시 진행 중, 유튜브 채널 올리브선교회TV)에서 중보자에게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고 각자의 교회로 직장으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세 번째 연합사역에 함께하는 것 다음 세대와 통일, 3년 미만의 신혼부부 또는 결혼 예비 커플을 만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사역을 하고 있다.

| 세상의 시선
Q.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내가 보아왔던 세상은 이렇다. 가난한 자들, 부자들, 권력가 명예가 있던 자들 모두 인생의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중독에 빠져가는 것을 보았다. 술, 담배, 게임, 관광, 쇼핑, 성 중독 등. 이러한 중독은 일시적이나마 고통을 피하게 해 주지만, 더 큰 고통으로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만약 내가 한 가지 원하는 대로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한 가지 능력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에게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여 긍휼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이 땅 가운데 보내신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싶다. 그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릴 수 있고,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생각의 시선
삶으로 보여주신 영적 스승, 어머니
Q. 내 삶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나는 어머니의 삶을 통하여 신앙인의 삶의 핵심인 예배, 말씀, 기도, 전도의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매 순간 최선을 것으로 최선을 다해 드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예배 중 하나는 바로 동생의 죽음이 있었던 주간의 주일예배였다. 둘째 아들을 잃고 괴로운 심정으로 매일 눈물만 흘리던 어머니에게 주일이 찾아왔다. 그 당시 어머니는 교회학교에서 소년부 교사로 섬기고 계셨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너무 괴로워서 소년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맡겨진 소년부 영혼들은 부모 없는 고아처럼 다른 반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분반 공부와 예배를 드려야 했다. 어머니는 자녀를 잃은 것도 괴로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영적인 자녀들이 또 흩어지는 것을 생각하니 더 괴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예배에 참석하셨다. 하지만 분반 공부 시간에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도저히 가르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게 되어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어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시곤 펑펑 우셨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함께 펑펑 울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 같다. 예배자의 정신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다른 한 아들은 술주정뱅이가 되어 소망이 없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예배드리러 가셨던 어머님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셨다. 이 일이 있는 후, 어머니의 반 학생 수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너무 많아져서 반을 나눠야 했다. 그해 말에 어머니는 전남노회에서 주는 최우수 교사상을 받았다. 그 상을 받으시며,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소년부 아이들은 어머니의 삶의 통하여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가장 소중하며, 우리 인생 가운데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의 삶을 통해 교육받았던 것이다.

Q. 끝으로 독자들에게 권면과 도전의 한마디?
어쩌면 너무 뻔하고 너무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남자는 힘이라 믿으며 자신의 의로 살아온 지난 시간, 지현호 선교사는 “하나님은 나의 의가 아니라 성령님께 ‘네, 주님’하는 그 순간이 가장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 차근 차근 알려주셨다.”라고 말했다. 골방에서 드린 하나님을 향한 숱한 고백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들으시고 지현호 선교사의 삶에 여전히 응답하고 계신다. 지현호 선교사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오는 11일, 2020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자세히 간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