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일본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한 유명 방송인이 최근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남성의 정자를 기증 받아 아들을 출산한 소식이 들리면서 이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본인이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상태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자신의 몸을 통해 아기를 낳은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생명은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통해 태어나는 것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급격히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문제는 복잡하다. 결코 단순히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신학적, 윤리적, 현대 의료와 과학,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난해한 문제이지만 회피할 수도 없는 주제이기에 논의의 물고를 튼다는 생각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첫째, 이 문제를 다루기 전 먼저 기독교계가 반성해야 할 장면이 있다. 지난 2004년 당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였던 황우석 박사 팀은 인간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세계적인 과학학술지인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 발표는 인간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여 당시 전 국민적 호응을 받았고, 그는 일약 전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논문과 연구에 심각한 조작이 있음이 발견되었고, 특별히 사람의 난자를 불법적으로 취득하는 등의 연구 윤리위반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당시 기독교계는 황우석 박사의 이 연구 윤리 위반 행위에 대해 침묵하였다.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황박사 팀의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는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언론이 황박사 팀의 연구로 엄청난 부가 산출된다는 말에 흥분하여 생명보다 돈의 가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정부는 2005년 허술했던 생명윤리법을 강화하여 정자와 난자의 채취 등에 대한 규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병원과 학회의 윤리 지침도 정자와 난자를 공여하여 시술할 경우 “원칙적으로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규정하였다.

기독교계는 급속도로 변화되는 이 세상의 문제제기에 대해 바른 답을 제시하지 못한 자기반성이 절대 필요하다. 답은커녕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때로는 답을 주려는 시도조차 피하려고 한다. 이와 함께 생명의 가치보다 재물의 가치를 숭배하는 세속주의의 공격 앞에 침묵하고 때로는 동조한 것에 대해서도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가 이 방송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룬다는 성경적 결혼관을 깨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성경적인 부부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오늘날 세속주의 사회는 이런 전통적,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현재 동성애의 바람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한국 사회, 특히 젊은 층에서는 이 문제를 죄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의 성적 취향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동성애에 대해 허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분명하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비밀이다. 이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는 분명한 원칙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이 방송인의 출산은 아기의 인권이라는 입장에서 수용할 수 없다. 그 분은 자신의 몸의 상태가 자연임신이 어렵고 아기를 낳기 원하지만 출산만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급히 결혼하는 것이 싫어서 이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일면 여성으로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분이 낳은 아이가 자라서 ‘이름 모를’ 자신의 아빠를 찾지 못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경우에는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아기를 가지고 싶어하는 엄마로서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했다지만 아기가 살아갈 인생에 대해 아기가 가지게 될 실존적인 고통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자신의 아기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중요하다면 아기가 당연히 가져야 할 인권에 대해서는 더욱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이 분을 한 켠 이해하고 싶지만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넷째, 생명의 가치는 인간의 좋고 나쁨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이 방송인의 결정을 인정하자는 박남철 한국공공정자은행 이사장은 뉴시스라는 신문과 통화에서 “정자 등 매매를 허용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저출산 현상이 두드러진 현재 상황에서 국가가 좋은 정자를 선별해 아이들을 출산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국가가 좋은 정자를 선별해 아이를 출산할 수 있게 장려한다?” 무서운 말이다. 생명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뭔가? 정자와 난자의 질이 좋은, 그래서 ‘열등종’은 없애고, ‘우등종’은 퍼트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인가? 그 열등과 우등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창 1:26-27). 그렇기에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귀하다. 그 사람이 똑똑하든지, 우둔하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존재 자체의 귀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치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기준에 맞추려는 시도는 있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의 고통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불임 가정의 문제, 장애아와 그 가족의 고통의 문제, 성폭행으로 인한 낙태의 문제 등은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다. 바로 이 순간 피조물인 인간이 알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글을 맺는다. 유명 방송인의 금번 출산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화두를 던졌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 더 큰 충격적인 문제가 우리를 향해 사방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이런 세속적인 사회, 더욱이 코로나 19 시대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강한 이때 성경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 힘에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실 절망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게 된다. 우리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선지자적 비관주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전수해야 한다. 그리할 때 절망의 땅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되지 않을까?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편 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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