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노래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노래할 수 있을까?

선한 정치로 백성들은 살기 좋아졌고 나라도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기쁨이 없었던 왕이 어느 날 현자를 불러 조언을 청하자, 현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기져다 입으면 된다도 조언을 했습니다. 이에 왕은 신하들을 보내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라 명했습니다. 며칠 후 한 신하가 그런 사람을 찾았노라 아뢰자, 왕은 빨리 그 속옷을 달라합니다. 그러자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그 사람은 속옷이 없었습니다."
속옷조차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고, 모든 것을 가진 왕이 기쁨이 없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설사 그 행복한 사람이 속옷이 있다한들 왕이 그 속옷을 입으면 행복했을까요?

이런 아이러니가 지금 로마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을 뿐 아니라 상업활동을 못하게 되어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바울은 외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선언은 당찰 뿐 아니라 숨이 멎을 지경입니다. 원문에는 3~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숨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현실은 슬플지라도 노래라도 부르자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강렬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노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보다 더 힘겨운 상황에 있던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이 노래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사건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의 현실은 로마에 감금된 상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실만 보면 암담한 상황입니다. 억울한 상황입니다. 당시 바울을 심문하던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 하였다"(행 26:32).
바울은 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차라리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석방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재수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누구보다 당당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3절).
그는 지금 이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복이라는 것인지 살펴볼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로마에 와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바울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주신 것이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겠다는 결사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이 홀로 로마에 갔더라면 그는 도중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자, 로마 시민인 바울을 지키기 위해 천부장이 나섭니다. 바울을 호송하는 로마 군인이 약 오백여명에 이릅니다. 그러니 아무리 결사대라 할지라도 바울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바울이 로마에 오기까지 지켜주셨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철학을 자랑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저 아시아의 귀퉁이에서 시작된 철학이 먹혀들 리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감금될 때 그의 곁에 간수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의 곁에는 4명씩 4교대로 간수를 붙여놨습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하루에 16명에게 감시를 당하는 것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그 16명이 꼼짝없이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에는 적지 않는 신자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것도 억울한데, 그가 도왔던 사람들에게 도리어 배반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괴롭히자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줍니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지금 블레셋과 싸우는 것은 나 여기 있으니 잡아가라고 떠벌리는 것과 같다면 극구 말렸지만, 다윗은 동족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그일라 사람을 도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로 인해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것이 사울에게 알려졌고, 결국은 사울이 그일라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이때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숨겨주는 대신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은 보기 좋게 배신 당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유유히 그곳을 떠납니다. 이런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사무엘상 23:14을 보면 답이 있습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 23:14). 현실적으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이라 다윗의 목숨이 사울에게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노라면 억울한 일도, 힘든 일도 당합니다. 그럴지라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여유 있게 살 수 있고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상황을 보십시오.

2. 영적인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영적인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바라보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요? 그는 그 복을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39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는 이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자랑거리는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빌3:7~9).
그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걸 버렸을 때,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고전4:13). 심지어는 고린도 교인들조차도 바울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을 당황해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이 영적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은 고난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당시 소돔에 살고 있던 롯과 소돔 사람들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게 잡혀 가자, 아브라함은 자기 종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롯과 소돔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그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려하자 아브라함을 이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이 부자가 된 것이 소돔 왕의 도움 때문이라는 말이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을 소돔 왕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기에 소돔 왕이 주는 재물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적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땅에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나 다윗이나 그들 앞이 캄캄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1952년 7월 4일, 36세의 수영선수 플로렌스 체드윅은 L. A.에서 가까운 카타리나 섬에서부터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해서 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 선언은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미국 전 지역에서는 그 도전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했습니다. 그녀는 16시간 동안 계속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안개를 헤치고 사력을 다해 나아갔지만 자기의 힘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안타깝게도 기권하고 자기를 따라오던 구조선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배로 해변에 도달하고 보니까 안개 때문에 안보였던 도착지점이 포기한 지점에서 불과 5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이 실패 후에 그녀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이유는 추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안개로 인해 제가 목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그녀는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그때는 이전보다 더 추웠고, 그날은 예전보다 더 안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성공했습니다. 성공한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전보다 더 추웠고 안개도 더 많았지만, 저는 제 마음 속에 목표물을 두고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보는 것 같이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래요. 우리네 삶은 지금 코로나19라는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목표를 붙들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 해결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자부심을 갖고 나간다면, 우리는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그리면서 오늘도 하나님을 노래하며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youtu.be/LFcgbeoUqng
저작권자 © 투데이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