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제법 커서 청소년기를 지날 때, 하루는 딸이 묻습니다. “엄마 아빠는 우리들이 자랑스럽지 않은가봐?” 그 말에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 대한 자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니, 무지 자랑스러운데?” “그런데 왜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 자랑을 안 해? 다른 친구분들은 만나면 자녀 자랑을 많이 하는데, 엄마 아빠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 그랬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다보면 자연히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우리는 우리 아이들 얘기는 거의 안 했습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이에게 조용히 말해줬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 네 안에 다 있지 않니? 그런 상황에서 내가 너희들 자랑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니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께 대해서도 서운한 게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서운함이 어떻게 해결되느냐면 하나님의 본심을 알 때 해결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에게 상처가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부어주시는 넘치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복이 아니라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은 "ALL"이 아니라 "EVERY"입니다. 즉 양이 아니라 종류입니다. 하늘에 있는 복이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 감격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 안의 상처가 말끔히 치유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선택의 복"입니다. 우리를 언제 선택하셨나요? 4절을 보면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택의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피하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벌써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저와 여러분의 자격 조건에 상관없이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레미야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예레미야 1:5~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태에 짓기 전,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탄식하며 말합니다. "나는 아직 어려서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저더러 선지자가 되라니요?" 하나님은 확신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불러 사명을 주셨는데, 예레미야는 확신이 없이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내가 잘 하는 것을 보고 선택했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려고 애를 쓰고 있나요? 근본적인 이유는 남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돈이라도 있어야 무시 당하지 않습니다. 남들 앞에 뭐라도 내놓을 것이 있어야 무시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에 큰 금목걸이라도 걸쳐야 하고,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가락지라도 끼워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네가 공부 좀 못해도 괜찮아. 네가 돈을 좀 못벌어도 괜찮아. 설교 못해도 괜찮아.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난 네가 좋아.” 이것이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상처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내가 잘하는 것은 다 제쳐 두고 못하는 것만 끄집어 내어 흠을 잡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나를 택하시되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감격 앞에 여러분의 상처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창세 전에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세 전에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복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아들"은 정확히 말하면 "양자"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도 아들과 동등한 권한을 갖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은 죽일 수 있었습니다.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 피를 이어 받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재산 상속은 아버지가 정하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귀족들이 여러 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누구의 혈통을 이어받았느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가 누구를 후계자로 지목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시원치 않으면 양자를 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양자는 아들의 권세를 갖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가문의 권세를 갖게 됩니다. 양자가 되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 반지가 굉장한 권위가 있습니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59년에 제작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라는 영화입니다. 벤허는 당시 예루살렘이 사는 갑부의 아들이었지만,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날 그를 보려고 지붕에 올라갔던 누이가 그만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총독을 죽이려 했다는 반역죄로 몰려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중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릴 적 친구였던 메살라 사령관은 벤허 일가의 억울한 사정을 알면서도 권력에 도취되어 그들을 모른척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벤허가 위기에 처한 아리우스 사령관을 구해주면서 그의 양자가 됩니다. 그리고아리우스의 반지를 끼고 배신한 친구 메살라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찾아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메살라는 들은척 만척 콧방귀를 낍니다. 이때 벤허가 손가락의 반지로 도장을 찍습니다. 이때 메살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립니다. 그 순간 벤허는 옛날의 벤허가 아니라 로마의 가장 위대한 사령관의 후계자로 친구에게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벤허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며 우리를 무시하지만, 우리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는 순간 달라질 것입니다. 이 반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표식이며, 또한 그 나라를 상속 받을 상속자라는 증거입니다. 하늘 나라를 상속받을 우리가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한다고 서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여유 있게 웃어 넘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그들의 전부이기 때문에 여기에 목숨을 걸지만,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기 때문에 잠깐 머물다 갈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가진 자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더 큰 것을 가졌어도 작은 것에까지 연연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가장 큰 것, 가장 좋은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해 서러우신가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손가락에 끼워진 보이지 않는 반지를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표식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youtu.be/7hnPX77oa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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