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익어갑니다. 그 푸르던 이파리들은 하나둘씩 아름답게 채색되어지고 그 무더운 여름날을 보상이라도 받은 듯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마음 성급한 어떤 단풍들은 벌써 멀리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유년의 추억 속에서 끄집어 낸 가을은 풍요로움과 여유, 그리고 낭만이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산과 노오랗게 포장된 들판은 우리의 놀이터였고 우리의 보물창고였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을 것이 있었고,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즐겁게 할만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년의 가을은 내게서 익어갔습니다.

그리고 타작하는 날이 되면 우리는 또 한 번 들뜬 마음으로 저녁시간을 기다립니다. 그 날은  온 동네의 잔칫날이었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타작을 하기 위해 불을 환히 밝혀놓고 타작마당 한 가운데에는 그해 수고한 농작물이 창고에 들여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흥분되는 순간입니다. 올해의 농사가 잘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판가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은, 큰 형님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타작한 벼를 가마니에 담으면서 “한 섬이요, 두 섬이요”라고 외치곤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수확량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하여 말에 벼를 담을 때는 엉성하게 담아야한다는 것쯤은 어린 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전보다 더 많은 벼를 수확했다든지, 이웃집 누구네 보다 더 수확을 했으면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올해 농사는 몇 섬을 했느니 하는 말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그 수치를 늘리고 싶어 하는 마음과, 조금 더 늘어난 수치를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던 아버님의 모습이 이제는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네 목회자들은 더욱 더 고독해지나 봅니다. 그 고독의 시간에 주님을 찾아 깊이 교제하며 묵상을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우울한 감정에 홀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달려왔건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고, 그 모든 책임이 나의 것인 양 모두가 돌아간 뒤 홀로 목양실에 남아서 눈을 감노라면 그렇게 송구스럽기까지 한 가을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도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길만한 나이가 됐건만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하는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건 왜일까요?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수치를 묻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교회이거나 대형교회에서는 별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작은 교회에서는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매년 이맘때쯤이면 곱게 타오르는 단풍을 바라보면서 낭만을 즐길 여유도 없이 목회자들의 마음은 그 무엇엔가 쫓기곤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읊조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한다고......

한 군사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은 교관들이 엄하고 혹독하기로 소문난 훈련소였습니다. 훈련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유독 장거리 구보만 하면 영락없이 대열에서 떨어져 외롭게 달리는 꼴지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그 병사만이 혼자 뒤쳐진 채 비틀거렸습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낙오자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는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 

"하...할 수 있다. 헉헉......"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양 갈래 길이었습니다. 각각의 길 앞에는 이정표가 서 있었습니다. 오른쪽 길은 사병이 달리는 길, 왼쪽은 장교가 달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양 갈래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장교가 달리는 길이 더 짧거나 편하겠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편한 길로 달릴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사병이 달리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30분이 채 안돼 결승점에 도착했고 놀랍게도 9등을 기록했습니다. 9등은커녕 50등 안에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는 분명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훈련 교관이 물병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잘 했어. 마시라구"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하나 둘 탈진한 군인들이 결승점에 들어섰습니다. 모두가 장교가 달리는 길을 선택한 군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알았나? 갈림길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았던 성실함이 바로 자네의 무기였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양심을 지킨 그는 더 이상 나약한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때론 자신이 낙오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어쩌면 눈앞의 결과물이 그렇게 흡족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성공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속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걸어온 당신은 성공신화를 이룩한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공신화를 좇아 지름길을 찾아 달리려는 때에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걷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이 가을, 대지를 수놓았던 주님의 아름다운 숨결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그렇게 흘려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그들에게 말입니다. 작은 자라고 스스로 말하나 결코 작지 아니한 그들에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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