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협받는 믿음 1
창16:1~16: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16:1, 개역개정)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창16:1, 새번역)
16장으로 넘어가자마자 등장하는 첫 구절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아브람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그 많은 약속과 확증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으며, 그 이유가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로 남아있는 한 아브람은 언제까지나 자식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보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이 현실을 극복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는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변수가 등장합니다. 바로 1절 후반부에 나온 애굽 사람 하갈의 존재입니다.
하갈에 대해 창세기가 주는 정보는 두 가지입니다. 아브람의 종이라는 것과 애굽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 두 가지와 16장 이전에 하갈이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한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갔다가 나올 때 얻게 된 많은 재물과 종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추측이 맞다면 하갈은 애굽 생활의 결과물 중 하나이며, 아브람과 사래에게 애굽에서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려주는 존재입니다. 애굽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관점으로서, 오로지 현실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선택의 상징입니다. 이런 선택에선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중요하기에 상황이 몰아가는 그대로 따라가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위험도 스스로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이 바로에게 사래를 빼앗길 때까지의 상황이 바로 이 선택의 결과였죠.
애굽이 주는 두 번째 의미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위기로 느껴졌던 상황이 기회가 되고, 재앙이 축복으로 바뀌는 바로 그 날의 경험이야말로 애굽에서 얻은 가장 값진 보물이었죠. 결국 애굽 사람 하갈의 존재는 아브람과 사래가 가진 두 가지의 선택지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방식대로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에 나를 맡길 것인가 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람과 사래의 선택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죠.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 개역개정)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창16:2, 개역개정)
지금부터는 성경을 유심히 읽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한 각 사람의 입장을 잘 헤아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내가 이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등장인물 각자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이죠. 사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꽤나 어렵게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글자 그 이상이기 때문에 그냥 읽어서는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구절도 많고, 조금 딱딱한 문체의 글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가 구분이 되지 않으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도 하니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읽고 연구했어도 성경은 여전히 어렵고 두꺼운 책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성경과 씨름한지도 20여년이 넘다 보니, 이제는 성경이 저를 향해 조금씩 미소 짓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언가 말을 걸어온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성경이 웃음 지으며 말을 걸 때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말로 집중해서 주의 깊게 읽는 것이 필요하고요.
지금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래의 심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문제니, 나라도 나서서 해결해 억울함을 풀겠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엔 어느 누구의 동의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에게도, 하갈에게도, 심지어 하나님께도 선택권을 주지 않았으니까요. 사래가 결정한 그대로 일은 진행됩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선택은 애굽에 들어갔던 아브람의 선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때는 아브람의 선택 때문에 사래가 위기에 처했다면 지금은 사래의 선택으로 인해 모두가 위기를 맞는다는 것만 다를 뿐이죠.
하갈은 졸지에 큰 벼락을 맞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선택권이 없었던 하갈로서는 이 일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 뿐이었죠. 주인 아브람의 아들을 낳아 결국 아브람 집안의 어미가 되는 좋은 길과 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염치없는 종이 되어 온갖 괴롭힘과 수치를 당하는 나쁜 길입니다. 어떤 면에선 둘 모두 선택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 사는 것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는 하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떤 결과가 되든지 끝까지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가 현명했다면,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아마도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삶의 결과는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음이 장차 드러나게 되죠.
사래와 하갈은 분명하게 태도를 정리할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사래의 말을 들었을 때, 애굽을 선택한 자신의 실패가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고 수차례 자신을 찾아와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래의 결정을 따르게 되죠. 여기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 중 하나는 애굽 이후로 급격하게 소원해진 사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사래를 볼 때마다 껄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이렇게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사래를 말릴 입장이 되지 못했던 것이죠. 게다가 아들이 없는 원인으로 세간에 지목되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누구보다 사래이다 보니 그녀의 계획을 가로막을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순전히 사래의 작품이라고만 해도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 역시 어느 정도 이 계획에 동의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15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아브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을 받으리라는 것이었죠. 사래가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된다고 하지 않으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대로라면 아브람 몸을 통해 아들이 나와야 하는데,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이제까지 걸림돌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래의 제안대로 진행된다면 사래가 아닌 하갈을 통해 ‘아브람 몸에서 날 자’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람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현실적으로도 전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래의 말에 못이기는 척 동의한 이유였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왜곡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뒤트는 행동은 오로지 말씀을 들어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죠.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켰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말씀의 의도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해석대로라면 하나님은 가족도 도덕도 무시한 채 오로지 아브람에게 아들만 주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됩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을 리 없습니다. 약속은 받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려는 조급함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이것이었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씩 왜곡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행동을 합리화했던 일이 여기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아브람은 여러 면에서 통하는 게 참 많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