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협받는 믿음 창16:1~16:16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16:4, 개역개정)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창16:4, 새번역)
사래는 하갈이 임신하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하갈조차 임신하지 못하길 바랐을까요? 어쩌면 두 마음이 모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 못지않게 사래 또한 아들을 원했지만, 하갈마저도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된다면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 또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하갈은 임신을 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모든 주인공들이 극적인 드라마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브람은 임신 소식이 무엇보다 기쁘고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의구심에 빠졌을 겁니다. 사래 역시 겉으로는 기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역시 내가 문제였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하갈이 낳은 아이가 정말로 아들이어서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경우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 또한 덤으로 얹어야 했죠.
가장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사람은 누구보다 하갈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자신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나 아브람 집안의 종이 되어 살다가 이제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자의 어미가 될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정말로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장성해야 완성되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인생역전도 이런 인생역전이 없죠. 아마 임신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집안에서 아이를 가졌으니 마님 대우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임신 후 사래를 멸시했다는 창세기의 진술은 이런 측면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여성의 불임에 대해 오늘날과 창세기 시대의 관념은 매우 다릅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개인의 존엄성이 널리 존중받는 지금은 불임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접근합니다. 남성 혹은 여성에게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지, 가족의 경제적 여건은 어떠한지, 무엇보다 2세에 대한 부부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따라 원인과 해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쓰일 당시의 생각대로라면 불임의 원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여성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하나님이 태를 닫으신 것‘이었죠. 이것이 오랜 세월 사래가 고통 받았던 이유입니다. 그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손가락질 받았던 것이죠. 하갈의 임신은 이를 정확하게 증명하는 것이었음은 물론 하갈을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이렇다보니 사래를 보는 하갈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일 사래가 아니었지만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16:5, 개역개정)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창16:5, 새번역)
사래는 하갈이 아닌 아브람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떳떳하다고도 주장하고 있죠. 하갈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를 선택한 것이 사래 자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실패한 임신을 하갈이 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이기도 합니다. 사래의 입장에서는 아브람이 정말 야속했을 겁니다. 아브람이 내렸어야 할 결정을 자신이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피해자가 되었으니까요. 하나님은 또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임신 문제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그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 자기 종이었던 하갈은 저렇게 단숨에 임신을 하게 되다니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원통한 마음은 사래로 하여금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16:6, 개역개정)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창16:6, 새번역)
후손을 낳는 일에 실패한 사래로서는 적어도 아브람의 아내라는 지위만큼은 놓칠 수 없었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자식을 낳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그 이상의 위치로 올라서지 못하게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죠. 이로 인해 하갈에 대한 사래의 학대가 시작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학대를 했는지까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갈은 본래 종이었고, 임신이 신분까지 바꿔주지는 않았을 테니 사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괴롭게 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라는 듯이 한 발 떨어져 방관하고 있는 아브람의 행동입니다. 아브람은 학대를 막기는커녕 다시 한 번 사래의 행동을 묵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구나 하갈이 지금 하나님이 자신에게 상속자로 주신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애굽의 경험 이후 아브람은 사래가 강하게 나오면 막지 못합니다. 평생 고통 받고 살았던 사래에게 더더욱 큰 아픔을 안겨 주었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녀의 행동을 막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나기만 한 것이죠. 결국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하갈은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종에서 주인의 후사를 임신한 여인으로, 그리고 다시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정말 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16:11, 개역개정)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창16:11, 새번역)
하갈은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광야를 지나가면 애굽 땅이죠. 아브람에게서 도망한 하갈이 갈 곳이라고는 광야 너머 애굽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어주셨고, 직접 찾아가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며,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이건 사래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들이었는데, 하갈은 사래로부터 도망쳐 다니는 상황에서 들은 것이죠. 사래가 알았다면 엄청나게 서운했을 일입니다. 사실 창세기를 읽고 있는 우리도 이런 실수를 종종 합니다. 빨리 응답받은 하갈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고 응답받지 못한 사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죠. 하나님이 하갈에게 나타나 말씀을 주신 것은 결코 그녀를 사래보다 더 사랑했거나 사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었던 것뿐이고, 그것을 하갈에게 알려줄 때가 되었던 것이었죠.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과 계시가 사람의 입장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갈도 예외가 아니죠. 어쨌든 이를 통해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 주신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16:13, 개역개정)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창16:13, 새번역)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모세, 기드온, 에스겔 등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불렀고, 아브람도 훗날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이 제물을 준비해 주신 것을 보고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죠.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애굽 출신 종이었던 하갈이 놀라운 통찰력으로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분’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고, 그 땅을 브엘 라헤로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이름을 지어주셨고, 하갈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에는 그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예언처럼 담겨 있다면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이름에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이름을 짓는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한 하갈은 이때 인생과 신앙 모두에서 큰 성장을 하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애굽에 가서 큰 성장을 하고 돌아왔다면 애굽 사람 하갈은 그들로부터 쫓겨나 광야에 가서 성장을 하게 된 것이죠.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창16:15, 개역개정)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창16:15, 새번역)
하나님을 만나 자기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한 하갈은 브엘 라헤로이로부터 아브람과 사래가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왔습니다. 앞선 7절부터 14절까지의 기록이 창세기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하갈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모두 다 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하갈이 이야기하는 이스마엘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요. 그럼에도 사래의 학대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을 겁니다. 도망갔다가 돌아왔다고 해서 덜 미워지거나 화가 누그러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돌아온 하갈을 전처럼 강도 높게 괴롭히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갈 역시 이전보다 성장한 만큼 더 성숙하게 사래와 아브람을 대할 수 있었겠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하갈은 결국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하갈에게는 이제 아이를 잘 키우는 과제가 남았고 사래는 하갈 뿐 아니라 커가는 이스마엘도 경계해야 했으며 아브람은 어쨌든 후사가 생긴 것에 만족했습니다. 잔뜩 뒤틀렸던 가족 관계와 위협받았던 신앙이 적당한 균형을 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것이 이 가족 이야기의 최종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컸고 이 가족에겐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