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의 시각’과 ‘세상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각은 숫자의 많음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래서 ‘0’(영)이 하나라도 더 많으면 그 앞에서 사람들은 위축되고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말하는 숫자와 규모의 논리를 거부한다.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한 시각과 해석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신다.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이 반드시 개입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이 맹신하는 숫자의 바벨탑은 무너지게 된다고 하신다.

사사기 7장을 묵상하며 이런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미디안의 13만 5천 명과 싸우는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가 나온다. 그 숫자는 32,000명이었다. 이 숫자만도 이스라엘로서는 미디안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중과부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숫자가 많다고 하신다.

그래서 1차적으로 걸러낸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하는데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숫자도 많다고 보셨다. 그래서 1만 명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물을 먹게 하는데, 이때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신 9,700명은 또 돌려보낸다. 다만, 물을 손에 받아 핥아서 먹은 300명만을 선택하신다.

어떤 성경주석가는 물을 손에 받아 핥아 먹은 사람은 적군의 상황을 살피는 전쟁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준비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선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해석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 전쟁의 성격이 어떤 지를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전쟁은 사람의 머리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야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모습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보게 되는 장면에서도 보게 된다. 135,000과 300명이 싸워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에서 아직 두려움이 있던 기드온이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의 진영 안으로 정탐을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미디안의 숫자를 이렇게 말한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삿 7:12)

여기서 기드온은 미디안의 군사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삿 7:13)

그리고 놀라운 장면이 이어진다. 이 꿈을 들은 친구가 ‘보리떡 한 덩어리’를 ‘기드온의 칼’(삿 7:14)로 해석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분명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미디안의 135,000명과 비교하면 ‘보리떡 한 덩어리’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기드온의 무시무시한 칼’로 해석케 했고, 결국 이후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사울과 이스라엘은 3미터의 거인 블레셋의 키와 칼과 단창을 바라봤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의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다윗은 골리앗의 3미터의 키와 무기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만군의 여호와를 바라봤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3미터의 거인과 그가 가진 큰 칼과 단창은 모용지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숫자의 맹신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역사는 비로소 꽃이 핀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런 다짐을 해 본다.

“우리가 숫자의 게임을 하면 반드시 진다. 우리는 보리떡 한 덩어리 밖에 안 되는 인생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해석에 순종하면 이 숫자의 신화를 깰 수 있다.”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는 숫자가 아니다! 해석이고 시각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상이 신봉하는 숫자의 신화와 규모의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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