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조상
창17:1~17:27
가족 사이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가족의 미래가 생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걱정했던 외부의 침입은 일어나지 않았고, 경제적 어려움은 잊은 지 오래였으며,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이스마엘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이 결말로 가는 마지막 과정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죠. 아브람도, 사래도, 하갈도 이대로 늙어가다가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이스마엘에게 남은 것을 물려주고 떠나면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7장에서 다시 한 번 파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창17:1~2, 개역개정)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창17:1~2, 새번역)
16장 마지막 절은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16:16) 그리고 17장 1절에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으니 16장과 17장 사이에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던 셈입니다. 13년이면 이제 더는 삶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100세가 가까워진 아브람에게 이제 무슨 변화가 있겠어요? 남은 삶을 잘 살면서 이스마엘이 성장했을 때 뒤를 맡기고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1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 겁니다. 그것도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약속을 가지고요.
15장의 첫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토대로 아브람의 상황을 추측했던 것처럼 17장의 첫 구절에도 같은 방법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이 전능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시죠. 이 시점에서 전능함을 언급하시는 것은 왜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손의 약속이 사래를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래의 생각을 받아들여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이런 자신들의 계획 덕택에 간신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여긴 채 13년이 흐른 겁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신앙의 감동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광야의 노년이 되어가고 있던 것이죠.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5, 개역개정)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창17:5, 새번역)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함을 미래에 실현될 아브람 후손들의 세계로 제시합니다. 아브람은 아들 한 명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후사는 아들 한 명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이 낳은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후손들을 통해 민족들이 나오고, 그 민족들이 더욱 번성해 여러 민족으로 분화하고, 그리하여 여러 나라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한 명만을 생각하지만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뤄질 거대한 민족과 국가의 역사까지도 보고 계신 것이죠. 아브람이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바꾸는 것을 통해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먼 미래에 완성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고 바다의 모래처럼 가득한 믿음의 후손들에 대한 비전을 이 하나의 이름에 담아주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개역개정)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창17:10, 새번역)
하나님은 이어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할례는 남성의 성기 끝 피부를 잘라내는 것을 말하는데요,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말하신 직후에 할례를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모든 자손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말씀 뒤에 할례를 명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뿐만 아니라 몸에도 새기라는 것입니다. 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상처의 흔적을 남기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치 가장 중요한 글자를 문신으로 새겨 넣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5~16, 개역개정)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창17:15~16, 새번역)
드디어 사래에 대한 약속이 나왔습니다. 그간 수차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그 어느 약속에서도 사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고, 이것이 이스마엘을 낳은 원인이 되었죠. 그런데 이제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꿔주시고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을 통해 여러 민족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가 깜짝 놀랄 엄청난 약속을 주신 것인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 봅니다. 놀라기는커녕 엎드린 채로 웃어버리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7~18, 개역개정)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창17:17~18, 새번역)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0세가 된 남자가 무슨 자식을 보겠으며 90세가 된 여자가 출산을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부터 전능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아브라함은 전능함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겠죠. 이스마엘이나 잘 살면 좋겠다는 대답은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닙니다. 진심이었어요. 아브라함의 상상력으로는 이스마엘 이상의 일은 처음부터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도 때로는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네요.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창17:21~22, 개역개정)
그러나 나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그를 떠나서 올라가셨다.(창17:21~22, 새번역)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의 이름을 모두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이삭을 낳을 구체적인 시기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바랐던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약속을 이제야 주신 것이죠.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약속에는 말을 더 보탤 것도 없고, 의심의 여지도 없고, 달라질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할 일은 그 말의 뜻을 되묻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것도 아니었죠. 주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것을 믿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창17:23, 개역개정)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종과, 돈을 주고 사온 모든 종 곧 자기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포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았다.(창17:23, 새번역)
아브라함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사람 모두에게 할례를 행한 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당시 아브라함이 99세, 이스마엘이 13세였는데요, 이스마엘과 다른 집안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만 아브라함 자신이 할례를 받은 것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아브라함이 취한 태도는 ‘난 이미 끝났고, 이스마엘이나 잘 살면 되는 거야.’였습니다. 가족들 모두에게 할례를 주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은 굳이 받지 않고 뒤로 빠질 수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 99세가 된 아브라함이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한 겁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삭의 아버지가 될 것으로 생각해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창세기에 굉장히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기록되었습니다. 11장 후반부에 처음 이름이 등장해 25장에서 사망하게 되니 성경 열다섯 장에 걸친 인생이었죠. 많이 기록된 만큼 그는 여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도 있지만 때론 어리석기도 하고 비겁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무책임한 면도 엿보였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안주해 있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나면 다시 일어나 불확실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적이지 않고 확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90세가 된 여인이 자식을 낳게 된다는 것보다 비상식적인 말씀이 또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것이 정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을 수 있을까요? 기적을 경험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믿음은 기적이 있거나 없거나를 따지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믿는 그 순간이 이미 기적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좋습니다^^
좋게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그 마음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