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박한 멸망 2
창18:16~18:33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6~17, 개역개정)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바래다 주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창18:16~17, 새번역)
식사를 마치신 하나님과 천사들이 일어나 다시 길을 가려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유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신 하나님이 저 멀리에 있는 소돔을 바라보시더니 혼잣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이 독특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나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간의 대화와 매우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확실히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와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평상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생각하지 못하던 때에 불쑥 나타나셔서 자신의 말씀을 주시고는 기약 없이 사라지시곤 했으니까요. 물론 그 때마다 최선을 다해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었지만 둘의 관계만을 보면 주인과 종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을 종이나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사역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초보 신자로 좌충우돌하던 과거의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사역의 파트너로 표현했지만, 하나님께서 파트너가 없어서 일을 못하실 리는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파트너는 동업자라기보다 사역의 비전을 함께 나누는 공유자에 가깝죠. 이런 관계는 먼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와 함께하실 때 이미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어주시고 그와 함께 그것을 차근차근 이루어가시며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을 매우 즐기셨죠. 지금은 아브라함이 과거 아담과 하와가 맡았던 파트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아브라함을 파트너로 인정하시면서도 왠지 말씀하기를 꺼리는 듯한 태도를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주저하시는 걸까요? 어쩌면 이것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진짜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사라가 낳을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 매우 극진하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서 조금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신 것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체 어떤 말씀을 하시려 했고 무엇 때문에 말씀하기를 주저하셨을까요?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18:20~21, 개역개정)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창18:20~21, 새번역)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홍수와 같은 전 지구적 심판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지는 않으실 것이었지만 소돔과 고모라 만큼은 심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들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시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을 먼저 찾으신 것일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속마음으로는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어떻게든 심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일깨우고 싶으셨을 겁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하면 그가 적극적으로 만류할 것으로 짐작하셨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를 먼저 찾으신 것이겠죠. 이미 아브라함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로 생각하고 계셨으니 그에게 심판 계획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줄 것을 간청하리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상태였기에 하나님이 심판까지 결심하시게 된 걸까요? 물론 그들이 범한 여러 가지 죄도 중요한 이유였을 겁니다. 하지만 단지 죄만이 문제라면 심판은 좀 더 유보될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성읍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은 곳이 있었을 리도 없고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게 된 데에는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문제가 너무 시급해서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확인해야 할 정도였죠. 해답은 20절에 언급된 ‘부르짖음’입니다. 죄도 싫어하시지만 그들이 범한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더 이상 들으실 수 없었던 것이죠. 18장 18절에서는 심판의 이유를 부르짖음과 죄로 설명하시지만 19장 13절에는 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부르짖음 때문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죄가 문제없는 것이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을 그만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소외된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에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들으시고 전능하신 손을 펼쳐 세상에 의로움을 다시 세우실 테니까요.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18:23~24, 개역개정)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창18:23~24, 새번역)
두 천사를 소돔에 보내고 홀로 남으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조금은 당돌해 보이는 청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설득해 심판을 막아보려는 의도였죠. 아브라함의 논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 전체에 심판을 내린다면 의롭게 살던 소수의 사람들까지도 심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한다는 판단을 하셨던 것인데, 오히려 이런 아브라함의 설득을 이유 없다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시는 모습입니다. 오십 명의 의인이 있다면 심판하지 말아달라는 청을 받아주셨다가 사십오 명으로, 사십 명으로, 삼십 명으로, 이십 명으로, 십 명으로 줄어들 때마다 아브라함이 요청한 그대로를 받아주셨죠.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돔은 고작 의인 열 명이 부족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소돔이 범하는 죄가 어떤 것이며, 부르짖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혹여 함께 심판받게 될 의인이 있지는 않은지 까지 말이에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이어가며 그의 계속된 설득을 받아주셨고, 19장에서 보듯 굳이 천사를 보내 실상을 확인하시고, 주저하는 롯 가족을 강권해 구원하시게 되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일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설득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소돔과 같이 타락한 백성들에게서도 희망을 찾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대화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죠. 과연 소돔에는 임박한 심판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의로움이 남아있을까요? 오십에서 십 명으로 숫자를 줄여가며 하나님을 설득하려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있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이 그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창세기 19장이 이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