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제주연동서부교회 이상성 목사(lee-sangsung@hanmail.net)의 작품

요한복음을 새해 들어 묵상하고 있다. 최근 요한복음 8장을 묵상하며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조차도 용서하지 못함으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두고 주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접근 방법에서 사람과 복잡한 세상의 문제를 푸는 지혜를 얻게 된다.

말씀의 배경이 되는 때는 초막절이었다(요 7:2).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다(요 7:43). 그리고 이스라엘 종교의 양대 축이지만 서로를 향해서는 불신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합하여 주님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에 주님을 잡을 수 없었다(요 7:30).

그리고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갔고, 주님은 기도하러 감람산으로 가셨다(요 8:1). 이른 아침에 주님은 다시 성전으로 가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이때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다. 순식간에 성전 뜰은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말했을 것이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온단다, 함께 구경하러 가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이게 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말한다. “이 여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하는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들은 모세의 제자답게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했다(참고. 요 9:28). 이 질문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찾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정말 공정한 장면인가? 아니다. 왜 그런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성은 잡아 왔는데, 남자는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아주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그뿐 아니라 이들은 그 여인이 간음을 했다는 그 어떤 물증을 제시하지 않았다.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바리새인들의 고발에는 무언가 불공정한 허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간음죄를 지은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고발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스로 변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자신의 무죄를 강변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에서 ‘더 이상’이라는 말씀은 이 여인이 죄를 지은 것이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만일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을 반대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율법을 어기는 자로 낙인 찍혔을 것이다(참고. 레 20:10). 반대로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을 지지했다면 로마 당국에 고발 당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형 집행은 로마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마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대답하면 하나님 대신에 로마의 가이사를 숭배하는 것이 되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제국을 거부하는 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요 8:6). 주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어떤 성경 사본에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쓰셨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다. 그럼 뭘 주님이 썼을까? 어떤 사람은 “나는 너희들이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적으셨다고 한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에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라는 사람이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작품이 있다. 한 벌거벗은 여자가 두 남성 앞에서 아무런 수치심도 없다는 듯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19세기의 인상주의를 이끈 프랑스 화가인데, 마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이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미술전에서 낙선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1863년 작품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1863년 작품

이 작품에 얽힌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여성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여성이었다고 한다. 말이 사교계이지, 사실 몸을 파는 창녀였다. 작품을 보러 간 많은 남성들이 이 작품 속 여성 앞에서 쭈삣쭈삣 피했다고 한다. 그 여성이 남성을 바라보며 당신이 지난 밤에 한 일을 나는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시 주님이 땅에 그런 글을 쓰신 것은 아닐까? 모른다. 주님이 뭘 썼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면 성경이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밝히지 않은 것은 주님이 뭘 썼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주님은 이 살벌한 현장에서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도자로 불렸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정죄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용서하는 모습이 대조된다는 점이다. 외식하던 이들과는 달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여인에게 누구와 간음했는지, 몇 번 간음했는지, 언제부터 간음했는지 전혀 묻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한 여인으로 대표되는 이런 사람까지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죄악이 어떠하던지 예수님께 참된 회개를 한다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닐까? 그렇지만 주님은 여인의 죄에 대해서는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요 8:11). 용서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회개로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이렇게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치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용서 받은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듯이 말이다. 이것이 용서 받은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말 것이다(마 18:34).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는 실수와 죄악에 대해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너무 가슴에 두지 말자.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라이온 킹>(The Lion King)을 보면, 영화 시작 부분에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로 장엄하게 외치는 노래가 나온다. “circle of Life”이다. 그러나 나는 멧돼지 품바, 미어캣 티몬, 어린 사자 심바가 부르는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가 참 좋다.

스와힐리어로 “Ha”는 부정어다. “no” 정도 되는 말이다. “kuna”는 “-이다, 존재하다”라는 뜻이다. “matata”는 “문제, 걱정거리”라는 말이다. 합치면, “걱정하지 말라” “문제 없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실제로 이 말을 “문제 없다”가 아니라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웬만한 일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서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면 어떨까? 일만 달란트 빚진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웬만한 것은 문제 삼지 않는 것, 이것이 주님의 백성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용서 받았는가? 그렇다면 용서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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