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물고기의 삶은 아주 특이합니다. 이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5~8CM 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 까지 자라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 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같은 물고기이지만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두면 대어가 되는 아주 신기한 물고기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코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주변 환경에 따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그 삶에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코이의 법칙,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나요?
그런데 이 코이의 법칙에는 한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이 물고기가 대어가 되고 싶다고 해도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져도 누군가가 이 물고기를 어항에서 연못이나 강물로 옮겨주지 않는 한 이 물고기는 자신의 성장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바꾸거나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이 코이의 법칙을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사람은 과연 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정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이유를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말씀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먼저는 해와 달과 별들을 포함한 모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있으라, 나뉘라, 드러나라, 내어라’ 하시며 모든 것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은 말씀이 아닌 흙을 재료로 삼아 직접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라는 말씀에서 “지으셨다”는 말은 원어로 ‘와이체르’라는 말인데 “직접 수고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은 말씀으로, 사람은 말씀이 아닌 직접 수고하신 작품으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위 더 귀하고 덜 귀하고 하는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기사를 보면 이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명령은 절대 복종을 전제로 합니다. 명령대로 하지 않거나 되어지지 않는 것은 여지가 없습니다. 명령은 명령대로만 되어야지 개선이나 차선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이나 동식물의 본능 또는 본성이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고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명령을 벗어나서 절대로 달라지거나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릅니다. 명령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원치 않으면 명령이 먹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람에게 믿음이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창1:26) ‘다스린다’는 정치용어는 국어 사전에서도 ‘보살펴 관리하고 통제한다’, ‘사물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잘다듬어 정리하거나 통제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다스림으로 정리하고 관리하며 통제하는 능력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 어떤 만물도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바꿀 수 없지만 오직 사람은 자신의 삶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스릴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축복을 받고 세상에 왔습니다. 도전해 보십시오! 우리의 환경을 답답한 어항에서 강물로, 강물에서 더 넓은 바다로 만들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글ㅣ한상준 목사(청운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