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숫자 많다고 대접만 받다가는 타락의 길로
한 달에 한 번 노동 현장 일하며 일꾼들에게 선교
받은 일당으로 노숙자들에게 호떡 구워 나눔
한국교회 연합까지 준비하는 ‘삼십분의 일(1/30) 운동’ 

출석 교인 150명이던 시절, 한 집사님이 자장면을 대접하면서 건넨 말. '목사님 격에 맞지 않게 자장면을 대접해서 죄송합니다.' 그 집사님은 교회 개척 시절, 함께 컵라면을 나눠 먹던 영적 동지였다. 그날 이후로, 자신의 목회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는 마을안교회 최영섭 목사.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땀 흘릴 줄 아는 노동이야말로 진짜 목사의 <격(格)>이라 고백하는 최 목사의 사역 후일담과 삶의 여정을 만나봤다.

인터뷰를 위해 마을안교회를 찾은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해 준 최영섭 목사
인터뷰를 위해 마을안교회를 찾은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해 준 최영섭 목사

ㅣ삶의 시선 

탕자 같은 삶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눈물의 회심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진정한 변화와 성장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

Q. 목사님의 삶을 영화/드라마의 장르로 표현한다면? 

성장(회심)드라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변화’다. 한가지 계기로 인해 목표도 변하고, 성향, 기질, 인격 모든 것이 변화됐다. 나이가 들어서 변화되는 자연스러운 변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변화다. 

Q. 하나님의 첫사랑을 경험한 순간은? 

예배를 통해서다. 너무 뻔한 대답인가(웃음).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예배. 실패와 절망이 계속되다 보니 방탕 속에 빠졌다. 탕자와 같은 삶이었다. 그때, 큰 울림이 되는 설교를 들었다.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Q. 탕자와 같은 삶이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삶을 살았나? 

스물 셋이었다. 탕자처럼 사는 나를 그냥 둘 수 없었던지 어머니와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나도 어렸을 땐 교회도 열심히 출석하며 상도 많이 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 사고뭉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고, 열일곱 살에는 홀로 서울로 상경해 참 많은 방황을 했다.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결국 어머니께서 올라 오셨고, 어머니의 오랜 설득 끝에 마지못해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됐다. 서울 개봉동에 위치한 반석교회였는데 찬양과 기도, 말씀. 예배의 감격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어릴 적 믿음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고,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됐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 담판을 지어야겠단 생각에 무작정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Q.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회심을 경험했다. 진정한 회심이었다. 인생을 잘못 살아왔음을 깊이 깨닫게 됐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기도만 나왔다. 그렇게 물만 먹고 20일 간 금식 기도하며 눈물, 콧물로 회개 기도만 드렸다. 그 후, 3년 반 동안 날마다 울었다. 길을 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울기만 했다. 지난 시간이 어찌나 후회되고, 하나님께 죄송하던지. 교회 가서 기도하면 지난 날이 너무 가슴 아파 데굴 데굴 굴렀다. 내게는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인생의 전부가 달린 일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됐다. 

Q.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과 후, 변화가 있다면?

내 자신의 완전한 변화다. 나는 분노와 폭력이 늘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후, 온화한 성격으로 변화됐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해준다. 요즘엔 사람 좋아 보인다는 소리도 듣는다. 다행이다(웃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나에게는 십자가가 전부이다. 그 외에 것은 다 바람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Q. 결국 어머니를 통해 회심하게 됐다. 신학의 길을 간다고 했을 때, 반응이 어떠셨나.

정말 기뻐하셨다. 너무 너무 좋아하셨다. 용산시장의 노상에서 마늘을 까는 부업을 하시면서도 신학 공부에 필요한 노트와 필기구를 직접 마련해주셨다. 그런데, 내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보다 더 기뻐하신 분이 계셨다. 바로, 우리 형. 형은 참 크리스천이셨다. 시골교회를 정말 헌신적으로 섬겼다. 당시 교회 화장실이 재래식이었는데 매일 같이 화장실 청소를 했다. 새벽이면 늘 교회의 종을 치고, 추울 땐 난로에 불을 지피고, 농사를 지으면 첫 수확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 크리스천.. 비록 스물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주님 곁으로 갔지만 형의 순수한 신앙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Q. 스물 셋에 회심 후, 신학을 결심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흔들린 적은 없었나?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성장이 정체됐던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목회는 실패한 목회’라고 충고를 해줬다. 기가 막혔다. 목회 성공을 교인 수로 평가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내 생각을 뒤로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교회가 그린벨트 지역에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 참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결국에는 그린벨트라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생각에 성전 이전을 결심했다. 그런데 부동산에 내놓은 지 일주일 만에 정부에서 발표가 났다. 우리 그린벨트 지역이 아시안게임 선수촌 단지로 선정됐다고. 바닥까지 떨어져 내가 포기하고 싶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 올려주셨다. ’너의 힘으로 하는게 아니고 내가 하는거야!‘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렇다. 내 생각,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힘으로 붙들어주셨다.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회 이전은 접고 지금의 자리에 성전을 세웠다. 하나님 은혜다(웃음).

ㅣ사역의 시선 

목사의 격이란,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삼십분의일 운동' 통해 삶의 예배 드려

젊은 신학도들에게 흘려보내는 자성과 섬김 그리고 회복의 정신

Q. 현재 맡고 있는 사역을 소개한다면? 

인천 남동구에 위치한 마을안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삼십분의일(1/30) 운동본부의 대표와 전국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연합의 첫 섬김 목사로 쓰임 받고 있다. 

Q. '삼십분의일 운동'이 생소하다. 어떤 운동인가?

'한 달에 한 번, 하루쯤은 목회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어보자'는 운동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성과 타인을 위한 섬김을 실천해보자는 취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다. 

Q. '삼십분의일 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아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한 후, 3년이 지나 장년부만 150여 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식사로 자장면을 대접하시는데, “이제 개척교회 목사님이 아니신데, 격에 맞지 않는 자장면을 대접해서 송구하다”라고 하더라. 개척교회 시절에는 나와 컵라면도 잘 먹던 분이셨는데,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한국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인가 그렇다면 목회자들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 교인 수에 따라 그에 맞는 대접과 격이 달라져야 하는 것인가, 교인 수가 오천 명, 만 명이 되면 그 목회자의 격은 한없이 올라가야 맞는 것인가. 목회자의 격(格)이란 과연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Q. '목회자의 격'에 대해 목사님이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목사의 격은 교인 수가 아닌,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사의 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교회가 성장해도 이 깨달음을 지키기 위해 내 스스로의 기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스로 한 달에 하루,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결심이 선 후, 우리 교회 남전도회장님께 일할 곳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처음엔 깜짝 놀라더라. 그러더니 일주일 후 안산의 한 일터를 소개해주셨다. 그래서 무작정 그 현장으로 나갔다. 일거리를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최영섭 씨’ 하고 내 이름을 부르더라. 그때,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목회자라는 직책이 아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렇게 차를 타고 일터로 가 하루 종일 박스 포장하는 일을 했다. 밥도 똑같이 줄을 서서 식판에 타서 먹는데 그것이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 그때 생각했다. ‘그렇지! 이게 맞는 거지.’ 교회에선 식사 때 목회자는 앉아있기만 하면 됐다. 성도님들이 밥도 가져다주시고, 반찬도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다.

Q. 그때 받은 임금은 얼마였나.

하루 종일 박스를 포장하고 번 돈이 5만 원이었다. 너무 소중했다.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주일 예배 때 선교 헌금으로 드렸다. 이후 평소 가깝게 지내고 존경하던 주변의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취지에 공감하며 함께 참여해주시겠다는 분들이 생겨났다. 현재 10여 명의 목회자들과 한 달에 한 번 모이게 됐다. 그렇게 ‘삼십분의일 운동’을 시작한 지가 14년 정도 됐다. 

나 자신에 대한 자성과 타인을 위한 섬김을 실천해보자는 취지의 삼십분의일 운동. 10여 명의 목회자들은 한 달에 한 번, 노동의 가치를 통해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성과 타인을 위한 섬김을 실천해보자는 취지의 삼십분의일 운동. 10여 명의 목회자들은 한 달에 한 번, 노동의 가치를 통해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Q. '삼십분의 일 운동'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삼십분의일 운동은 나 자신에 대한 ‘자성’과 타인을 위한 ‘섬김’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하고, 일거리가 없는 겨울이 되면 1년 동안 모아둔 임금으로 호떡과 어묵, 그리고 삶은 계란을 굽는다. 그리고 주변의 상인들과 노숙인 등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에게 ‘춥지만 힘내서 살아보자’고 건네면, 무척들 좋아하신다. 십일조를 드리 듯,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Q. 목회자들의 노동, 섬김으로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노동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들 깜짝 놀란다. 목사가 왜 노가다 판에 있냐고. 그러다가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기도 하고, 교회에 대한 오해를 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크리스천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되고, 결국엔 예수님에 대한 시각도 바뀌게 된다. 예수님은 늘 삶의 현장에 계셨다. 노동 현장 또한, 귀한 영혼들이 있는 선교 현장이다.

Q. '삼십분의일 운동'이 놀라운 연합도 이끌어 냈다고 하던데. 

‘삼십분의일 운동’을 벌이다 보니 참석한 목회자 가운데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조용히 하자는 의견과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정신을 후배들에게 흘려보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젊은 크리스천 지성인들이 모여있는 신학대학교와 대학원생들에게 눈을 돌리게 됐다.

Q. 신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참여 상황은 어땠나?

무작정 신학대학교 총학생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학생들은 교단과 교파 상관없이 문을 두드린 우리를 순수하게 받아 들여줬다. 또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공감을 해줬다. 3년 전, 첫 모임에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와 장신대학교 그리고 고신대학교 이렇게 세 곳의 신학대학교가 참여했지만, 지금은 열 세 곳의 신학대학교/대학원이 참여할 정도로 많아졌다. 

지난해 10월, 13개 신학대학교/대학원 총학생회 회장단 23명과 함께 유럽 종교 개혁지를 탐방했다. 터키 라오디게아 교회터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
지난해 10월, 13개 신학대학교/대학원 총학생회 회장단 23명과 함께 유럽 종교 개혁지를 탐방했다. 터키 라오디게아 교회터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

Q.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자성, 섬김, 회복을 위한 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학생 연합운동을 진행 중이다. 한국교회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상호 존중과 섬김 실천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다. 물론, 교단에 상관없이 초교파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별히, 작년 1월에는 열 세 곳 신학대학교 학생회장단 23명이 함께 유럽 종교 개혁지를 탐방했다. 함께 먹고, 자고, 고생하며 교단 간의 많은 교류를 가졌다. 또한 종교개혁주간인 2020년 10월 30일에는 ‘삽십분의일 운동 정신’인 자성과 섬김, 그리고 회복을 주제로 열 세 곳 신학대학교/대학원 총학생회가 ‘1일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Q. 사역 가운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삼십분의일 운동’을 할 때였다. 인천 부평역에서 호떡을 구워 노숙인들과 택시 기사님들께 나눠드릴 때였다. 호떡을 쌌던 종이를 소각하는데, 부탄가스가 폭발했다. 아내와 내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화상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하는데, 의사가 '다른 살을 이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 화상의 호전 상태를 보더니 의사가 '이식은 안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하더라. 결국엔 흉터도 남지 않을 만큼 치료가 잘 됐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시험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어도 삼십분의일 운동을 계속 할래?' 그때도 지금도 나의 대답은 하나다. "네, 계속 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미력하지만, 나에게 맡겨진 사역과 사명을 겸손히 감당해 나가고 싶다. 

ㅣ생각의 시선 

나의 유익보단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삶에서의 예배 위해 겸손해져야

Q.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교회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사회 속에서 존경받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교회가 지탄을 받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먼저, 우리 안에서 분열하지 말아야 한다. 상호 존중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Q.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영항을 끼친 것은?

회심 후,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이끌어 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중에 예레미야 33장 말씀이 생각난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2-3)

또 다른 하나는 앤듀르 머래이의 <겸손>이라는 책이다. 신학 공부를 위해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배 중에 참 겸손한 분이 있었다. 그분을 닮고 싶어 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밤마다 학교 뒷산에 올라 겸손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때 만나게 된 책이 앤듀르 머래이의 <겸손>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겸손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과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겸손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Q.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때 가장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유익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생각이다. 

"목사의 격이란, 교인의 수와 교회의 크기가 아닌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그 자체" 라고 고백하며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섬김과 회복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최영섭 목사.

ㅣ세상의 시선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공감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
세상과 함께 울고 웃는 교회 되어야

Q. 코로나로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다. 목사님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다는 불안함과 나와 내 가족이 언제라도 코로나에 감염 될 수 있다는 질병의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함께 공감해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Q. 반대로, 세상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어쩌면 한국교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사회는 교회를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교회는 사회적 공감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우리에겐 목숨 걸고 예배를 지켜야하는 사명이 있지만, 동시에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사명도 있다.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비대면 예배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아니겠는가. 교회의 솔선수범이 필요한 때다.

Q. 마지막으로 나누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인생의 답은 십자가 앞에 진심으로 섰을 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탕자를 성자로 바꿀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있으시다. 내가 그랬다.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삶의 현장에서 용기 있게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 인생의 골고다로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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