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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형제간의 갈등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의 형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끼는 관계가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하고 갈등하는 관계였다. 그들이 형제이면서도 경쟁하고 갈등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질투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 때문에 질투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질투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질투는 무서운 감정이다.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질투가 얼마나 저열한 감정인가를 말해 준다.

질투는 감정으로서만 끝나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질투를 파괴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질투는 대상이 망해야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서 쳐죽였다. 동생을 사랑해야 하는 형이 동생을 적으로 여기고 쳐 죽이고 만 것이다, 이처럼 질투는 무섭고 파괴적이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다윗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윗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던졌고, 골리앗을 쳐 죽이고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왕을 대신해서 전장에 나가 적을 무찌르고 승리한 장군이었다. 또한 다윗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반역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다윗은 사울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겠다는 흑심을 품은 적이 없다.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였고,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질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부르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는 노래소리를 들었다. 백성들 가운데 다윗의 인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사울 왕은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 질투는 감정으로만 끝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왕궁에서 창을 던져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고, 백성들에게 다윗을 고발하려고 명령했고, 심지어 나라를 지켜야 할 3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다녔다. 다윗이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살려주었음에도 사울왕의 광기는 식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질투의 무서움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교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인 교회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교인들이 경쟁하고 갈등하고 있다. 교인이 교인을 질투의 대상으로 삼고 그 교인이 망할 때까지 질투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한국교회 안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질투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교인이 높아지는 것, 인정받는 것, 사랑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질투를 극복하는 길은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먼저, 내가 질투하는 교인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사람을 내가 용서해야 한다고 결단한다면 질투를 넘어 참된 형제애를 가지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2절과 13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다.

질투를 극복하는 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 형제가 칭찬을 받으면 나보다 나은 사람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보다 남은 낫게 여길 때 무섭고 파괴적인 감정인 질투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치사한 질투를 극복할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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