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가운데 ‘면장선거’가 있다. 이 소설은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구 2,500명이 살고 있는 센주시마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섬마을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의 고질병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4년마다 돌아오는 면장선거를 둘러싼 ‘오쿠라’ 가문과 ‘야기’ 가문의 세력다툼이다. 두 가문은 말 그대로 앙숙이었다. 그러기에 어느 가문에서 면장이 나오느냐에 따라 가문의 운명이 달라진다. 선거에 이기면 4년 동안 영화를 누리는 반면에 지게 되면 4년 동안은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은 선거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선거가 치러지는 해에 이 마을에 두 사람이 파견근무차 도착한다. 한 사람은 성실하고도 모범적인 공무원 ‘미야자키’이고, 또 한 사람은 어수룩하기도 하고 돈키호테 같기도 한 의사 ‘이라부’이다

선거의 양대진영은 이 두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는데, 여 기에 대응하는 두 사람의 방법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 미야자키는 모범 공무원 처럼 그들에게 절대 동조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라부는 그들의 선거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니 선거전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도 비합리적인 섬마을 사람들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이라부는 선거를 도와 달라는 양대 진영에게 약속을 한다. 소위 양다리인 셈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발각되어 결국은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때 그는 ‘장대눕히기’ 시합에서 이기는 팀의 선거전을 돕겠다는 엉뚱한 제안을 한다.

장대눕히기 시합은 이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놀이였다. 그날은 모두가 하나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위험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금지시킨 지 벌써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시합을 제안한 것이다. 드디 어 시합이 벌어지는 날 마을사람들은 양대진영으로 나뉘어 혼신의 힘을 다해 실력을 겨뤘다. 그리고 이 시합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이 책은 막을 내린다. 결국 이라부는 이 마을의 고질적인 문제를 ‘장대눕히기’라는 그 마을 전통운동회를 통해 통쾌하게 해결한 셈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미야지키는 이 책 말미에서 이렇게 독백을 한다. '이제 다시는 도쿄의 잣대로 이들을 잴 생각은 없다. 이 섬은 이 섬 나름대로 잘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센주시마(이 섬의 이름)는 시소와 같다. 양쪽에 올라탄 두 편이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미야자키도 ‘융화’, 그리고 ‘대안제시’라는 이라부의 문제해결방식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화되어 함께 헤쳐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라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센주시마 섬마을만의 독특한 문화와 습성을 그 들과 동떨어진 도시 사람들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기려하면 고통이지만, 즐기려 하면 성취도 함께 온다
이기려하면 고통이지만, 즐기려 하면 성취도 함께 온다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미개한 마을에 문명인 하나가 와서 살게 되자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저 밭에는 괴물이 살고 있으니까 절대 가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도대체 어떤 괴물인지 궁금해서 그 밭에 가보았더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괴물은 바로 수박이었던 것이다. 이에 문명인은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칼로 수박을 쪼개어서 먹어 치웠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 이것은 괴물이 아니라 먹는 수박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음 날 주민 대표가 그를 찾아와 이 동네를 떠나 달라고 전갈을 보내왔다. 사람들은 수박을 먹어치우는 이 사람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동네에 현자가 찾아왔다. 역시 동네 사람들은 이 현자에게도 괴물이 사는 그 밭에는 가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이때 현자는 그 수박을 보면서 동네사람과 똑같이 놀라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동네사람들에게 문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동네사람들은 밭에 있는 것이 먹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더 이상 수박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현자는 이기는 방법보다는 즐기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오꾸다 히데오의 소설 속의 주인공 이라부처럼 말이다. 그들만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들과 융화될 수 없고, 융회되지 못하면 결코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변화는 융화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네 삶의 현장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이 세상 속에 묻혀 사는 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다. 그런데 이 변화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리 없다. 결국은 나의 삶의 현장, 그리고 일터에서 융화와 함께 이루워져야 한다. 세상은 향해 '당신들은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고, 나는 변화시켜야 할 주체'라고 오친다고 해서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들과 융화하면서 그 속에서 본을 보일 때, 결국 하나씩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목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이기려는 목회, 성공하려는 목회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의 신실한 목회가 필요하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는 것, 이게 어디 하루 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일까? 그날까지 그들과 융화되어 함께 즐기면서 하나씩 대안을 제시해 나간다면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변화된 그들의 모습, 아니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목회는 느릿느릿 가야 하는 모양이다. 새로운 목양지로 떠나는 새파란 후배에게 초로의 선배님이 이렇게 충고했단다. 
‘지둘려.’(’기다려‘의 충청도 방언) 
이기려고 하지 말고 즐기라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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