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 ‘린튼’과 ‘샬럿 벨 린튼’의 아들
3대째 이어 온 '한국사랑'
한국전쟁 참전과 교회 개척, 결핵퇴치 활동에 앞장서

결핵은 위생환경이 좋지 않은 옛날이나 개발도상국에서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 세계에서 매년 1,000만 명 이상의 신규 환자가 발생하고 있고 160만여 명이 사망하는 감염질환이다. 우리나라는 2017년을 기준으로 OECD 국가 중에서 결핵 발생률과 사망률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결핵 치료가 시작되면 약 2주 후 전염성이 없어지므로 6개월 이상 꾸준히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1950년대 열악한 위생 상태와 의료지식의 무지로 결핵 환자가 급증하던 시절 교회를 세우며 결핵퇴치에 앞장선 이들이 있다. 바로,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한국인 '휴 린튼'이다.

휴 린튼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운동과 해방 후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교육 사업에 앞장선 ‘린튼(한국이름 인돈)’과 호남지역에서 교회와 학교 설립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친 ‘유진 벨(한국 이름 배유지)’의 딸 ‘샬럿 벨 린튼(한국이름 인사례)’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잠시 유아기를 전라남도 순천에 보내기도 했다. 이후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1940년(휴 린튼의 나이 14세 때) 신사 참배 반대로 린튼 선교사 온 가족이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됐기 때문이다.

휴 린튼(한국이름 인휴) 선교사와 로이스 베티(한국이름 인애자) 선교사의 결혼 사진. 이들은 결혼 후, 첫 사역지로 전남 '순천'에 왔다. 순천을 중심으로 약 600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결핵 퇴치와 의료 활동에도 힘썼다. @출처=유진벨 재단
휴 린튼(한국이름 인휴) 선교사와 로이스 베티(한국이름 인애자) 선교사의 결혼 사진. 이들은 결혼 후, 첫 사역지로 전남 '순천'에 왔다. 순천을 중심으로 약 600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결핵 퇴치와 의료 활동에도 힘썼다. @출처=유진벨 재단

1947년 ‘로이스 베티(한국 이름 인애자)’와 결혼한 후, 1950년 컬럼비아대학교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53년 군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첫 사역지는 전라남도 ‘순천’이었다. 순천은 여수, 보성, 구례, 고흥 등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농어촌 복음화를 위한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등대선교회’를 설립해 순천을 중심으로 산골과 농촌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보통 일주일 단위로 전도를 계획하지만 때때로 10일, 한 달씩 검정 고무신을 신고 순회 전도를 다녔다. 낡은 지프를 몰고 비포장도로,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다녔기에 항상 먼지를 뒤집어쓴 옷과 진드기, 벼룩, 빈대를 묻혀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가 신고 다니던 고무신이 다 닳아 구멍이 나면 타이어 수리하는 곳에서 땜질해 신을 정도여서 별명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었다. 이러한 휴 린튼 선교사의 헌신으로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가 개척됐다.
또한, 선교뿐만 아니라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에 걸친 광양 간척 사업을 진행했다. 이때 개간한 땅이 20만 평이었는데,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휴 린튼이 교회 개척과 전도 등 선교에 중점을 두었다면, 로이스 베티는 결핵 퇴치와 의료 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1962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발생해 이재민과 결핵 환자가 급증하게 됐다. 이때 결핵을 막기 위해 부인 로이스 베티와 함께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게 됐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자녀들도 폐결핵에 결렸다. 

처음에는 집 사랑방에 간이 진료소를 마련해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끊이지 않았고 로이스 베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결국 로이스 베티는 직접 여러 선교 단체의 모금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1965년 입원과 요양이 필요한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결핵 요양원(현 순천기독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는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호암상과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휴 린튼의 아들인 '스티븐 린튼(한국 이름 인세반)'은 외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민간단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의 결핵 퇴치 등 보건의료지원을 펼치고 있다. @출처=유진 벨 재단
휴 린튼의 아들인 '스티븐 린튼(한국 이름 인세반)'은 외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민간단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의 결핵 퇴치 등 보건의료지원을 펼치고 있다. @출처=유진 벨 재단

휴 린튼과 로이스 베티의 아들인 ‘스티븐 린튼(한국 이름 인세반)’은 외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민간단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했다. 1996년 북한 재해로 인해 ‘식량 보내기 운동’, 1997년 평양 적십자병원에 앰뷸런스 지원과 결핵 약, X-Ray 기계 등을 지원했다. 

꾸준히 북한을 방문하며 13개의 결핵 병원과 63개 결핵요양소를 대상으로 결핵 약, 이동 X-Ray 검진차량, 현미경 등을 지원하며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힘쓰고 있다. 아울러, 간염 진단과 예방, 구강과 치과 사업, 의약품 지원 등으로 보건 의료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막내아들 ‘존 린튼(한국 이름 인요한)’은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 아버지 휴 린튼이 1984년 음주운전을 하던 버스와 추돌해 광주로 이송하는 도중 사망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존 린튼은 한국형 앰뷸런스 보급 사업을 펼치게 됐다.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으며, 특별한 공로(한국 최초 앰뷸런스 개발)를 인정받아 2012년 ‘특별 귀화 1호’ 한국인이 되었다.

휴 린튼의 막내아들 '존 린튼(한국 이름 인요한)'은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광주로 이송하는 도중 사망하게 되자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특별 귀화 1호' 한국인이 되었다. @출처=세브란스병원
휴 린튼의 막내아들 '존 린튼(한국 이름 인요한)'은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광주로 이송하는 도중 사망하게 되자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특별 귀화 1호' 한국인이 되었다. @출처=세브란스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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