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아버지에게 있는 두 아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상속에 대하여 분배해 줄 것을 요구하여 재산을 받아냅니다.
상속이라는 것은 원래 부모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상속분 즉,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 통념상 이웃 주민들에게 해를 당하여도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죽은 사람 취급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패륜이었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듣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고 이것에 따른 징계가 성경에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며 생활했습니다. 세상적인 생활에 젖었습니다.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자 굶주렸고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어 그는 먹을 것을 구하려 돼지치기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가장 비참한 가운데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 것이 생각이 났고 굶어 죽기 전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마을 초입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매일매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움에 그리고 반가움에 아버지는 아들을 안았지만 뛰어가 아들을 안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패륜아를 동네 어른들이 봤다면 돌로 쳐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살리려고 동네 사람들보다 더 빨리 아들을 발견하려고 매일매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혹시 돌에 맞을 수 있어서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패륜아를 죽이라는 율법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도 정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도 정죄하지 맙시다. 다시 돌아온 아들로 인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즐거워했던 것같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즐거워하며 축복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 있는 성도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고,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가 변화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글 l 조민수 목사(원주온누리침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