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근원 2. 창22:1~22:19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22:5, 개역개정)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창22:5, 새번역)
모리아 땅을 향해 떠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두 명의 종은 그 시간 동안 함께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짐을 나누어 지고,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를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과 일상의 시간을 보내며 고통스러운 여정을 계속해야 했죠. 그 72시간이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마침내 모리아 산이 눈에 들어왔을 때 아브라함은 두 명의 종을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단 둘이서만 산에 오르게 되는데요, 창세기 22장 5절을 보면 두 종에게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여 이삭이 죽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 것은 아닐까요?
모리아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이삭이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으로 생각했다고 썼지만(히11:19) 부활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절박한 마음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저 자신을 시험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르고요.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마음이 뒤죽박죽이 되어 엉켜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든 이삭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이삭을 드리고 나면 사라가 아들을 또 낳을 수 있을까요? 아들을 다시 볼 수 없다면 내쫓은 이스마엘을 다시 불러들여야 할까요?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주신 독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요? 끝없는 고민이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두 종과 이삭 또한 깊은 고민을 하는 아브라함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두 종에게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은 ‘이삭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개역개정)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창22:7, 새번역)
그렇다면 이삭은 어땠을까요? 그 역시 아브라함에게 무언가 중대한 일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 일에 자신이 관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겠죠.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아브라함의 예배는 언제나 자신이 있는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부른 것이지 특정한 장소를 찾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제사를 드리러 가는데 제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더욱 이상한 일이죠. 심지어 나그네가 찾아와도 최상의 동물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빈손으로 간다는 것이 이상했을 겁니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불쑥 던진 이삭의 질문에 이런 모든 궁금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먼저 ‘아버지?’라고 아브라함을 불렀죠. 여기에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했던 22장 1절의 하나님과의 대화가 그대로 오마주되고 있으니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던 아브라함은 이삭의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두 번의 부름 모두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셈이네요.
불과 칼을 손에 든 채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왜 이런 일을 자신에게 명하신 것인지, 정말로 자기 손에 들려진 칼을 이삭에게로 향하길 바라시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겠죠.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똑같은 마음을 경험하시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그 일을 할 마음도 있으시죠. 어디 그 뿐인가요? 아브라함 곁에서 번제에 쓸 장작을 등에 진 채 산을 오르고 있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점점 초조한 마음이 드는 이삭의 심정 또한 아주 잘 알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개역개정)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막15:34, 새번역)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삭의 모습과 완벽하게 겹칩니다. 등에는 나무가 있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자신에게 이런 일을 명한 아버지를 부르며 호소하는 모습 말이에요. 이처럼 모리아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은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정확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임을 창세기를 읽는 독자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시험이 아무리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서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