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근원2
창22:1~22:1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창22:9~10, 개역개정)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창22:9~10, 새번역)
아브라함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100세가 훌쩍 넘은 노년의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했고, 청년 이삭은 결박당한 채 저항도 도주도 하지 않은 채 그 칼을 맞으려 했죠. 마침내 제사의 제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삭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정황상 아브라함이 칼을 들기 전 구구절절 자세한 설명을 해줬을 것 같지도 않네요. 무작정 결박을 하고 칼을 겨누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삭이 받아들였다는 점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시험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닌 것 같네요.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만큼이나 제물이 되어 죽어야 하는 이삭에게도 커다란 시험이었고 자신의 남은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고도 단호한 것일지를 미리 아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3, 개역개정)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창22:13, 새번역)
아브라함의 칼이 이삭에게 닿기 직전 천사가 등장했고 시험은 끝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해 주셨음은 물론 새로운 제물을 주심으로써 이삭의 죽음도 막아주셨죠. 나무에 걸려 있던 숫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은 과거 개선장군처럼 애굽을 빠져나오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애굽에서 사라는 아브라함 때문에 남의 아내가 될 뻔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가정을 지킬 수 있었고,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애굽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아브라함 때문에 제물이 될 뻔 했다가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천사가 제지함으로써 살았고, 지금 이렇게 아브라함과 나란히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마음가짐은 애굽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달랐을 겁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으로 경험한 뒤여서 우쭐함과 즐거움이 넘쳤다면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에 담긴 깊은 의미를 경험하며 감사와 함께 경외심이 생겼다는 점이 다르죠. 아브라함은 믿음을 넘어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었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은 여기까지 오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삭은 어린 나이에 신앙의 진수를 체험하고 배웠다는 것인데요, 아브라함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에 걸친 아브라함의 시행착오와 번민이 있었기에 이삭이 그렇게 빠른 시간에 신앙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 개역개정)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22:18, 새번역)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그에게 주셨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는 말씀이 22장에 와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독자를 기꺼이 포기한 모리아 산의 체험 뒤에 말이에요. 복을 얻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복이 전파되기를 원하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복이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기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복의 원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바람과는 전혀 달라 보입니다. 복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복을 주려고 하면 때론 나 자신이 고통을 겪어야 할 수도 있고,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으며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아닌 눈물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한다면 쉽게 선택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신앙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모리아 산부터 가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는 12장부터 22장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 아브람이 조금씩 성장하며 믿음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내일 모리아 산 정상에 설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애굽에 내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곤란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정상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라시죠. 지금 이삭이 보고 있는 아브라함은 그런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이삭의 아버지, 야곱의 아버지,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복된 소식, 곧 복음의 근원이 된 것이고요.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22:19, 개역개정)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창22:19, 새번역)
모리아 산에서의 체험은 아브라함 신앙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이삭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다만 눈여겨 볼 것은 22장 18절에 바로 이어지는 19절입니다. 언뜻 읽으면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아브라함이 기다리던 종들과 함께 사라가 있는 그랄 땅 브엘세바로 돌아가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숫양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여정의 목적지가 바로 그 자리였음을 깨달았을 겁니다. 정확한 판단이었지만, 그것이 곧 아브라함 인생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는 않았죠. 삶의 목표는 이루었지만 여전히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산을 내려와야 했고 다시 3일간의 시간 동안 일행과 여행을 한 끝에 집에 돌아왔고, 그곳에서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야 했죠. 그 일상 속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사람들과의 작지만 여전한 신경전을 비롯해, 가축들을 먹이는 문제들, 집안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사라와의 관계들을 포함한 수많은 일들의 한 가운데에서 때론 수습하고, 때론 도발하고, 때론 굴복해야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을 데려가셨다면 그런 일은 하나도 겪지 않았겠지만,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