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애굽기 2:10)

나라마다 국민 정서가 조금씩은 다르다고 하지요. 미국인들은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면서 생존경쟁으로 “나는 살고 너는 죽자”의 정신으로 살았고, 유대인들은 함께 사는 길을 택하여 “나도 살고, 너도 살자”라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시장에서 종종 다투는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멱살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내가 못 살겠으니 너도 같이 못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은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무서운 민족이라고 합니다. 누가 좀 잘 나가고 유명해지면 칭찬하고 격려하고 밀어주면 좋은데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놓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법은 “나는 죽고”로 시작해서 “너는 살자”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모세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모세의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의 인구가 나날이 늘어나자 애굽왕 바로가 두려워하여 남자아이를 모두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석 달 동안 숨겨 키우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는 상황이 오자 갈대 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냅니다. 모세의 어머니를 통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두 가지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나일강에 갈대 상자를 띄우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아이를 살려달라고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나일강에 모세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키울 때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보상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둘째, 만남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어머니 요게벳을 만난 것이 축복입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 것을 보고 요게벳이 다른 엄마들처럼 나일강에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긴 채 키운 것이 은혜입니다. 또한,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누이 미리암이 곁에 있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끝까지 따라가 바로의 공주에게 유모로 어머니 요게벳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미리암을 통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바로의 딸인 공주를 만난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공주로 하여금 명을 어기고 히브리민족의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고도 불쌍히 여겨 양자로 삼게 하신 것이 은혜입니다. 훗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내 십보라를 만나게 하시고 형 아론을 동역자를 삼아 주셔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만남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조금만 더 힘내시고 이겨냅시다. 곧 5월을 맞이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만남의 축복을 통하여 형통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환경 때문에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온전히 맡기는 내려놓음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 ㅣ정준래 목사(인천선목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