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붉은 앞바다를 보며 하나님의 부르심 느껴
신학교 교수 시절, 한 해에 16명 퇴학시키기도
신학과 삶이 일치된 목회자 양성에 주력
직분에 상관없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 성직(聖職)

어린 시절 받은 소명으로 지금까지 한 길만 걸어온 김근수 목사. 은퇴 후에도 칼빈신학대학교 총장의 사명을 감당하며, 성직(聖職)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늘 거룩하게 살기를 소망하는 칼빈대학교 김근수 총장을 만나봤다.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목사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목사


| 삶의 시선

중학교 때 부름 받은 목회자의 소명
고난 속에서도 늘 함께하는 행복과 기쁨
하나님의 종으로서 늘 자유와 긴장을 오가는 삶

Q. 당신의 삶을 장르로 표현한다면?

굳이 표현한다면 ‘마이웨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지만, 내 길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돌이켜보면, 맹목적으로 끌려만 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긴장을 가지고 살아온 그런 삶이 아닌가 한다.

Q. 하나님의 첫사랑을 언제 경험했나?

사도 바울의 다메섹 사건처럼 그리스도 만나기 이전과 이후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험은 없다. 내 고향이 부산이다. 어릴 때 누군가가 나를 한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본 붉은 바다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때 나를 부르셨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해주신 증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 사실이 내 인생의 닻이 되어주곤 한다.

Q. 붉은 바다를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니 낭만적인 것 같다. 또 다른 경험은 없었나?

두 번째 목회할 때 일이다. 많이 아팠던 적이 있다. 교회 개척을 하면서 몸이 안 좋았었는데, 환상 가운데 홀연히 불기둥 손이 나오더라. 그러더니 그 손이 내 아픈 부위를 어루만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땀구멍이 다 보이고 큰 손이 아픈 부위를 계속 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선배 목사님들께서 하나님과 만남을 간증하실 때 특별한 경험을 주셨다는 말씀들을 자주 해주셨다. 나는 그 간증을 안 믿었었다. 하나님의 성경을 믿어야지, 꿈이나 환상 같은 이야기를 믿는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심을 깨달았다. 말씀을 초월해서 역사하신다는 하나님의 면전의식이 좀 바뀌는 계기가 됐다.

Q. 언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됐나?

중학교 3학년 때. 예전에는 바닷가 부근에 있는 교회들은 해양훈련을 종종 했다. 밤새워 기도하는데,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안 변하고 지금까지 왔다.

김근수 총장의 학창시절 모습
김근수 총장의 학창시절 모습

Q.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때가 6.25 전쟁이 끝나는 무렵이었다. 민족적 수난의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집은 부유했지만, 집안이 주저앉는 힘든 과정도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이 있고, 또 행복 속에서도 늘 고난이 함께한다는 사실. 그렇게 삶을 살아오다 보니 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생각으로 늘 긴장을 하다 보니 새벽 기도에 더욱 힘쓸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하던 새벽기도가 이제는 삶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새벽 4시 반쯤 되면 눈이 먼저 떠진다. 시계가 울리기 전에.

Q.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행복과 고난은 나눠지지 않는다. 늘 함께 공생한다. 처음 담임으로 부임한 교회가 가장 어려운 교회였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유학 갔다 와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도 참 어려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도 행복했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하다 보면 그것이 좁쌀처럼 작게 보인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나. 내가 실패하고 타락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패배하지 않는데, 내가 조급한 마음에 날뛰는 것은 건방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도 없이 목사나 신학 교수 되는 일은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Q. 나에게 가족이란?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뭔지 아나? 바로, 불공평해요라는 말이다. 눈 뜨면 아버지 없고 잠들 때까지 아버지가 안 오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족에 대한 개념은 약한 것 같다. 그러나 교회도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칼빈 가족이란 말을 자주 쓴다. 나에게 가족은 그런 의미다. 이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란 생각을 한다.

가족에 대한 개념은 약하지만 교회도 하나의 가족이라고 고백하는 김근수 총장
가족에 대한 개념은 약하지만 교회도 하나의 가족이라고 고백하는 김근수 총장

Q. 유학시절 어땠나?

유학 시절, 공부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하루에 3시간 일하면 기숙이 가능했다. 유학 공부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더라. 개혁주의 신학의 계보를 잇는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저녁 먹고 도서관 가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미어졌다. 그러면 카페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생소한 언어도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기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난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니 당연히 영어를 못 알아들었다. 학생들이 다 손을 들길래 나도 따라서 손을 들었다. 근데 그게 식당 봉사를 자원하는 거더라. 죽어라 공부해도 못 쫓아가는데 식당 봉사까지 해가며 공부해야 했었다(웃음).

영국 웨일즈대학교(Ph.D.) 졸업식 모습
영국 웨일즈대학교(Ph.D.) 졸업식 모습

| 사역의 시선

늘 목회와 신학 두 가지 사역을 병행
신학교의 주 목적은 좋은 목사를 세우는 것
신학과 신앙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칼빈대학교
몰락해가는 기독교 대학, 한국교육의 정책 수정이 필요

Q. 지난 사역에 대해 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늘 두 가지 사역을 병행하도록 해주셨다. 열 여덟 살에 신학교 들어가면서 교회 전도사로도 섬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 졸업하기 전에는 당시에 헬라어, 히브리어, 영어를 웬만큼 잘하니까 이 세 언어에 관련된 강의 부탁을 받았다.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는 한가람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신학교 강의와 목회를 병행했다. 늘 목회와 신학교, 두 사역을 병행해왔다. 낮에는 목회에 전념하고, 야간에는 칼빈 신학을 계속하다 보니 신학교와 목회 현장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은퇴한 이후에는 학교에만 전념하게 된 지 5년 정도 된다.

Q. 병행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오히려 조화가 있었다. 요즘 신학 교수 중에는 목회 현장을 모르고 너무 이론만 강조하는 교수들이 있다. 그렇다 보니 신앙과 생활이 다르다. 교수님 중에는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 많다. 그런데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새벽에 일어나서 열심히 기도도 해보고, 어려운 가정 붙잡고 울며 삶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해봐야 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신학과 신앙생활에 괴리감이 생기게 되고, 이게 곧 한국 교회의 위기가 됐다. 신학은 목회 현장에 대한 이해가 깊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모순 개념이 아니고 종합 개념이다. 신학교는 좋은 목사를 세우는 것이 주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선 목회와 학교 사역이 조화되어야 한다.

Q. 학교에 대해 소개해달라.

칼빈대학교가 개교된 지 70년이 됐다. 6.25 전쟁 바로 이후에 학교가 설립됐다.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 중에 신앙적 체험이 뜨거운 분들이 많아 신학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 분들이 중심이 돼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야간 신학교로 출발했다. 그때 박형룡 박사님이 칼빈대학교에 교장으로 오시면서 사명감이 있는 목회자들과 여교역자 분들을 많이 양성하셨다. 목회자와 선교사만도 800여명 이상 배출했다. 30년을 그렇게 성장했다. 졸업생들이 교회에 부임하면 허드렛일부터 겸손하게 섬기니 목회자로 성공한 분들도 많다. 또 철저한 개혁주의, 칼빈주의로 성경에 오류가 없고 철저하게 하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학을 가르친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을 때, 칼빈의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었다. 그 전통을 지키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교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원리와 질서로 따르는 신학을 추구한다.

칼빈대학교 전경 사진
칼빈대학교 전경 사진

Q. 칼빈대학교의 철학은 무엇인가?

칼빈대학교는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학이다. 칼빈주의라고 하니 칼빈을 우상화한다는 오해를 받게 돼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성경을 우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생활의 최고의 규범으로 따르며 산다는 것이 칼빈신학교의 철학이다. 개혁주의 정신은 세상과 교회의 간격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른 파트로 섬겨도 거룩의 가치는 같다. 길가에서 장사를 해도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잘 섬기며 선교한다면 그것이 곧 거룩한 삶이다. 우리는 목사가 성직이라는 말을 안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성직이다.

칼빈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 김근수 총장)
칼빈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 김근수 총장)

Q.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야간 신학교 때 일이다. 학기 말 시험에서 어떤 신학생이 커닝을 하고 있더라. 권고가 필요한 것 같아 그 학생에게로 가서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솔직히 이야기하시는데, “교수님, 제 아내가 지금 연세대학교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학기 말 시험에 떨어지면 같이 졸업을 못합니다. 같이 졸업하고 미국에 이민가게 돼 있어요.”라고 하는게 아닌가. 사정은 딱 했지만, 그래도 안 된다며 시험지를 뺏고 학점을 몰수했다. 결국 그분은 졸업을 못하게 됐다. 그 후, 그분이 처음에는 우리 집에다 큰 선물을 보내왔다.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랬더니 그 후엔 그분께 편지가 왔는데 “김근수, 네 배에는 칼이 안 들어가느냐”라는 내용이더라. 화가 나서 그렇겠지라며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 학기에 16명을 퇴학시켰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목회자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미국 유학 갔을 때, 한 교회에서 나를 강사로 초빙해주셨다. 나는 저녁 강사였고, 새벽에는 다른 강사분이 초빙됐다. 그런데 그 새벽강사가 내가 퇴학시킨 그분이더라. 그분은 미국 침례교단에서 안수받고, 유명한 부흥사가 돼있으셨다. 새벽 집회 때 강단에 올라가시더니 나와 있었던 일화를 눈물 흘리며 간증하셨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과 함께 (가운데 김근수 총장)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과 함께 (가운데 김근수 총장)

Q. 담임목사로의 삶의 어떠했나?

목회 현장을 40년 이상 섬겼다. 돌이켜 보면, 교회를 위해 시간을 많이 쓰지 못했다. 그게 못내 아쉽다. 성도들에게 더 깊이 들어가 살피고 돌봤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다. 그만큼 신학을 더 연구하고 집필도 많이 했지만, 스스로 반성하기는 반쪽짜리 목회를 했다고 자평한다.

Q. 지칠때 어떻게 충전하는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독특한 건강을 주셨다. 신학교 다닐 때 새벽기도에 빠지면 신학을 그만두자고 결심했었다. 그때부터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으니 기도가 생활화된 삶을 살았다. 육신인데 아프고 피곤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든 기도하면 문제는 좁쌀만 하게 보인다. 기도 덕분에 아쉬운 것도 없고, 후회할 것도 없는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Q. 달란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직책에 따라서 때마다 은사를 주셨다. 원래 남 앞에 서는 일을 잘하지 못했었다.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발견했다. 30분 이야기를 3분으로 축소할 수 있고, 3분 이야기는 30분으로  확대할 수 있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늘 이야기하는 부분이, 한마디라도 분명하고 선명하게 하라는 것이다. 성도들 머리 아프게 만드는 목사는 되지 말아야 한다(웃음).

Q. 기도제목이 있다면?

한국의 교육 정책이 수정돼야 할 게 많다. 교육을 좀 더 넓은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 대학은 원래 기본 목적이 목회자 양성기관이다. 그런데 목회자만 양성해서는 현재 교육 정책으로는 운영이 힘들다. 다른 대학과 똑같은 평가 기준에 의해서 미달되면 정원 감축, 학교 지원을 없애고 있다. 할 수 없이 다른 과를 만들게 된다. 기독교 대학들이 갈수록 몰락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똑같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대로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학교 미래에 대해 답답한 부분이 있다. 우리가 현실에 맞게 구조조정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잘해보자는 마음이 아닌 살아남자는 마음이니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그것이 기도제목이다.

인터뷰 중인 김근수 총장
인터뷰 중인 김근수 총장

| 생각의 시선

믿음과 윤리성은 손의 양면과 같이 분리될 수 없는 것
짧은 세월 헌신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Q.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과 행함은 손의 양면과 같이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따라온다.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 윤리성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다. 바리새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회당 물건을 훔쳐 가기도 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건데 착각 속에서 산다. 우리가 책망받아도 마땅하다. 그것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그 점을 학교에서도 많이 강조하고 있다.

Q.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은?

내 나이 칠순이 넘었는데 삶은 순식간에 지나가더라. 강물같이 흘러간 세월이다. 짧은 세월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 목회자를 바로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원할 수 있는 후원자들이 있어야 한다. 선교를 위해, 교회 미래를 위해. 한국 교회도 어려워지고 있고, 기독교 신학교도 어려워지고 있다. 이럴 때 후원하는 손길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목회자, 성도는 믿음과 윤리성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목회자, 성도는 믿음과 윤리성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 세상의 시선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 소금이 되어야하는 그리스도인
주어진 삶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쁜 세상 속에 기도의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야

Q. 총장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떠한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고, 일할 만한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삶의 자리. 여기서 믿음으로 살면 천국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 삶 속에 와 있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참 가치 있는 일인데, 너무 회의론에 빠져 삶과 결혼, 그리고 일,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깨닫게 해줘야 한다.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김근수 총장
그리스도인은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김근수 총장

Q.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나?

오랫동안 목회 현장에 있었고, 또 많은 신학생을 가르쳤고, 많은 목회자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회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가 있는데 똑같은 두 고양이에게 싸움을 시킨다. 어느 고양이 이기겠느냐 질문한다. 누구는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가 이긴다고 말하겠지만 이기는 것은 어느 고양이를 힘차게 응원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과 똑같이, 우리의 옛 성품과 새 성품이 우리 안에서 다투고 있다. 긴장 관계에 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새 사람, 새 성품을 힘껏 응원해야 한다. 조금씩 변하는 것도 너무 귀하다.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보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죄성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파라다이스는 없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70년 묵은 죄인이지 변화된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주어진 삶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Q.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가운데 어떤 변화를 보여야 할까?

말씀과 기도 외에는 길이 없다. 말씀과 접할 수 있는 기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면 변화를 가져온다. 오늘날 기독교 학교라든지, 기독교 방송 단체들은 사람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성경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 CTS가 기독교방송으로서 이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 간증과 설교, 그리고 찬송을 계속 접할 수 있도록 이 행동으로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내야하는 것이다.

Q. 독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한다면?

성도들은 지금 너무 바쁘다. 고민할 시간은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다. 잡다한 놀이나 세속적인 것에 심취할 시간 있으면 기독교적인 환경을 선택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인생을 거룩한 삶으로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사회의 영향력이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이고, 그런 의식이 있을 때 우리 기독교는 결코 이 나라에서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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