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God Will Make A Way
첫째와 둘째
창25:19~25:34
창세기 25장 19절은 본격적인 이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면서 동시에 창세기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이후에 나올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믿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중심이었습니다.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 아브라함의 삶은 아주 충실한 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가 되는 신앙의 첫걸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브라함이 보여준 셈이죠. 또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등장하셨습니다. 직접 말씀하시고, 사건마다 손수 개입하시고, 횃불로 나타나 언약을 주시는가 하면 유황불로 심판하기도 하시고, 심지어 몸소 내려오셔서 아브라함 앞에서 식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이삭 이후로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일이 점점 드물어집니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흔한 경험이었던 직접 말씀을 주시는 일조차 보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창세기 25장 이후로는 이삭과 야곱, 요셉과 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삶을 자세하게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읽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요, 이를 통해 우리가 처한 여러 다른 상황에서 신앙의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 속에서 신앙이라는 열매가 어떻게 맺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성품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창25:21, 개역개정)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창25:21, 새번역)
25장 19절과 20절에 짧은 이삭의 족보가 제시된 이후 본격적인 이삭 이야기의 첫 구절이 되는 21절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 인생 전체에 대한 약속을 담은 말씀을 주셨던 것에 비교하면 굉장한 차이가 있는데요,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임신하지 못했던 사라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완성작에 가까웠던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시간이 거꾸로 흘러 믿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브라함과는 분명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반쯤 포기했다가 후처를 얻어 아들을 보려 했던 아브라함과 달리 하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가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이것을 보면 이삭의 믿음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상당히 성장한 상태에서 출발했음이 확인됩니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그분께 의지해야만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리라는 것을 집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죠. 이삭은 아브라함이 남긴 믿음의 유산만큼 그의 출발점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25:22, 개역개정)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창25:22, 새번역)
이런 모습은 리브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배 속에 있는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알았을 때, 리브가 역시 이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사라와 같은 상황에서 시작했음에도 이런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사라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죠. 이삭과 리브가는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 믿음의 첫 단계를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출발점이 유사하다 하더라도 이삭과 아브라함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고 리브가와 사라 또한 그러했으니까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 한 명만을 키웠습니다. 그에 앞서 이스마엘이 있었고 사라 사후에 아브라함에게 후처가 낳은 여섯 아들이 더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이 매우 어릴 때 집을 떠났고 배다른 동생들이 태어난 것 또한 장성한 뒤의 일이니 실질적으로는 이삭 하나였던 것이 맞죠. 하지만 리브가는 쌍둥이, 즉 두 명의 아들을 동시에 가졌고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이삭에게 처음 경험하는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리브가는 이삭과는 달리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익숙한 면도 있었는데, 이런 차이는 훗날 두 아들 사이의 알력 싸움에서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개역개정)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25:23,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리브가는 그저 같은 뱃속에 사는 두 아기가 싸우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들 모두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놀라운 예언을 덜컥 주셨던 겁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이삭의 마음에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독자로 자랐던 만큼 형제들 간의 반목이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리브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뒷부분에서 확인되는 그녀의 오빠 라반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그녀 또한 형제들 틈 속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죠. 큰아이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회적 관습 속에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리브가로 하여금 작은 아이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증폭하는 결과가 되었을 겁니다. 그 아이가 바로 자기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 오랜 세월 객지 생활을 하면서 리브가의 오빠 라반에게 발이 묶인 채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했던 야곱이고요.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창25:25~26, 개역개정)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창25:25~26, 새번역)
창세기는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름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붉고 털이 많아서 에서이고 야곱은 발꿈치를 잡아서 야곱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이런 이름짓기도 이전과는 분명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전 세대인 아브라함, 사라, 이스마엘, 이삭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이 짓거나 바꿔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이름들에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날 뿐 아니라 이름을 받은 사람의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죠.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이름이 지어지는 과정에는 하나님이 전혀 개입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지도 않죠. 깊은 의미를 담기 보다는 지금 막 태어난 아기의 모습에서 떠오르는 단어가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삭 이후의 세대가 아브라함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바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아브라함 시대가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과 인도하심으로 만들어진 신앙 표준의 제시였다면 이삭 이후의 시대는 철저하게 인간의 생각과 기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죠. 이름이 지어지는 과정은 그 출발점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시대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지만, 이삭 이후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게 되니까요.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에서는 붉은색과 털이라는 에서 고유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됐지만, 야곱은 그의 행동, 그것도 타인의 발꿈치를 잡은 행동에서 그의 이름이 왔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의 인생을 가름하는 첫 번째 상징인지도 모르겠네요. 이후의 삶을 보면 에서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았고, 그것을 통해 자기만의 결실을 거두는 사람이죠. 반면 야곱의 삶은 언제나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았고, 누군가를 피하려고 도망 다녔으며, 누군가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항상 전전긍긍하게 되니까요. 타인의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의 인생은 아무리 성공해 봐야 남의 발목에까지 미칠 뿐이죠. 이것이 야곱의 본성이자 그가 타고난 기질의 한계인데, 이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가 향후 창세기 야곱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