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급속히 부흥하고 성장하자 곧이어 신앙의 도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복음의 도전의 외적인 요인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신앙 탄압정책이었다. 제국의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은 스토아(stoa) 철학도들로서 다신교적인 대중종교에 멸시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철학적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만이 박해를 받은 이유가 있었다. 근본 원인은 신앙 때문이었으나 많은 경우에 있어 신자들이 세속사회를 멀리하는 생활태도 때문에 생기는 오해도 있었다. 

(1) 기독교가 로마제국에게 박해 받았던 배경(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참조)

① 로마정부의 황제숭배 정책과의 충돌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황제예배 거부가 핵심원인이 되었다. 황제예배의 거부가 기독교인들은 비애국자이며 반국가적인 사람들로 오해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황제숭배는 제1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마땅히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② 예배의식의 오해 

성례를 '사랑의 향연'(love feast)으로 잘못 오해하여서 기독교인들의 예배란 신자들이 비밀리에 함께 모여서 음란과 방탕의 축제를 벌인다고 생각하였다. 성찬식을 잘못 오해하여 유아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③ 무식한 미신적인 종교라는 오해 

학식 있는 이교도의 귀족층들이 기독교를 매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무식한 대중들로서 그들의 교리가 지혜의 허울을 쓰고는 있으나 결국은 어리석고 자기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일부 로마인들이 천재지변의 불상사가 발생할 때 그것이 기독교인 때문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④ 신자들의 비사회성 

그 당시 사회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유행하던 시대였기에 성도들은 세상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한 성도들의 지나친 성별 운동이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하고 증거할 기회마저 상실하게 되어서 오해는 증폭 되었고 박해는 더욱 가증되었다. 성도는 세속의 죄악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가리켜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박해의 양상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참조)

네로황제(Nero, 54-68)로부터 시작하여 디오클레티안(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84-305) 황제에 이르기까지 10 대 박해가 있었다. 제국전역에 걸친 박해는 데키우스(Gaius Messius Quintus Decius Augustus, 249-251) 황제와 디오클레티안 황제 시대 등 두어 차례이었고 대부분 국부적이며 산발적인 박해이었다. 특이한 사실은 박해를 가했던 제왕들의 최후의 모습이다. 기독교 신앙을 탄압한 대다수의 로마황제들은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였다. 그 왕들이 죽은 직후에 박해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잊을 만하면 다시금 신앙탄압의 폭군들이 등장하곤 하였다. 

박해를 가했던 황제들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네로(Nero 54-68), 도미티안(Domitian 90-96), 트라얀(Trajan 98-117), 하드 리안(Hadrian 117-13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202-211), 막시미 누스(Maximinus 235-236), 데시우스(Desius 249-251), 발레니안 (Valenian 257-260), 디오클레티안 갈레니우스(Diocletian Galenius 305-311) 황제이다. 불같이 혹독한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교회는 파멸되지 아니하였다. 초대교회의 환난을 살펴볼 때 계시록 2장 10절의 말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교훈을 되새겨 보게 된다. 

(3) 박해의 결과 

장기간의 박해는 무수한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전체 성도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교회는 더욱 성장되어갔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 능력 있게 성장하였다. 터툴리안은 이교 권력자들에게 말한다.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고문하고 가루로 만드십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쓰러뜨리는 만큼 우리는 증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피가 그들의 추수를 가져올 씨앗입니다.” 

그와 같은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회의 내적인 문제를 야기시킴으로 격렬한 신학논쟁과 분파작용을 가져오게 하였다. 신앙 탄압을 받을 때 신앙을 버리고 배교한 사람들의 입교문제로 인하여 교회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게 되었다. 신앙의 순결만 강조하고 용서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므로 기독교회 안에서의 분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오랫동안의 계속된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일부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인격을 지나치게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순교자와 그 유물을 숭배하는 그릇된 신앙 관습마저 형성되었다. 서머나교회에서는 폴리갑 감독의 유물을 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귀중하게 여겼으며 이그나티우스 감독의 유물도 역시 비슷한 존경을 받았다. 

박해가 계속됨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2세기와 3세기에 걸쳐서 변증신학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박해의 법적 기초와 일반 민중들의 비난의 그릇된 사실들을 학문적으로 논박하였다. 변증가들은 로마정부의 박해와 일반 민중들의 오해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효율적으로 변증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있었다. 그 결과 상당한 수준의 학문이 요청되어 기독교 신학의 체계화가 시도되었다. 신학이 학문으로서 출발점이 된 사실은 변증가들의 업적 중의 하나이다. 아쉬운 것은 복음을 중심으로 하여서 그 당시의 학문을 이용하여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고 전달하여야 하는데 철학에 중심을 두고 철학을 복음화 한 나머지 신학논쟁의 불씨를 가져다준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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