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와 둘째 2
창25:19~25:34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28, 개역개정)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25:28, 새번역)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삭은 그런 에서를 좋아했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죠. 에서가 사냥꾼이 된 것은 좀 특별해 보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부터 아버지 이삭까지 모두 양이나 염소 등을 키우는 유목민이었던 집안에서 사냥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여간 어색해 보이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에서는 독립심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집안의 전통 혹은 가업의 승계와 같은 가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 보이니까요. 이삭이 야곱보다 에서를 좋아했던 이유도 이런 기질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삭에게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이 매우 컸죠. 아브라함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들임과 동시에 배다른 형을 쫓아냈을 정도로 중요한 상속자였지만 이것은 동시에 이삭이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죠. 결혼도 아버지의 뜻대로 했고 심지어 아버지에 의해 희생제물이 되어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리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보는 앞에서 심장에 칼을 꽂고 말았을 겁니다. 이삭이 아브라함 생전에 브엘라헤로이에서 살았던 것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지 짐작해 봅니다. 이랬던 이삭이기에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에서에게 좀 더 애정이 가지 않았을까요? 에서는 참으로 이삭이 가지지 못한 것을 많이 가진 아들이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그늘에 머무는 삶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쌍둥이 형 에서를 삶의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야곱으로서는 형을 향한 이삭의 편애를 모를 리 없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을 겁니다. 리브가는 리브가대로 자신을 따르는 야곱의 모습에서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예언의 말씀을 떨쳐내기 힘들었겠죠. 말씀대로라면 결국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될 아이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니 리브가 역시 야곱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고 이삭과 리브가의 서로 다른 아들에 대한 사랑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창25:29~30, 개역개정)
한 번은,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는데, 에서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야곱에게 말하였다. “그 붉은 죽을 좀 빨리 먹자. 배가 고파 죽겠다.” 에서가 ‘붉은’ 죽을 먹고 싶어 하였다고 해서, 에서를 에돔이라고도 한다.(창25:29~30, 새번역)
에서는 왜 야곱의 죽을 탐냈을까요? 그 정도로 배가 고팠다고 해도 다른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정 죽이 먹고 싶으면 일하는 종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해도 되었을 것이고요. 허기진 채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날 사냥에 실패한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야곱의 죽을 원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에서가 보기에 갓 끓인 야곱의 죽이 너무 먹음직해 보였고, 야곱은 하필이면 에서가 가장 허기졌던 때에 가장 맛있어 보이는 죽을 끓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순한 우연과 소박한 욕망의 만남이었을 사건인데, 야곱은 이것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듭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25:31~32, 개역개정)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은 먼저, 형이 가진 맏아들의 권리를 나에게 파시오.” 에서가 말하였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창25:31~32, 새번역)
아무리 좋게 보려 하여도, 고작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요구한 야곱의 제안은 무리해 보입니다. 그걸 덥석 받아들인 에서의 결정 또한 의문을 가지기에 충분하고요. 이를 통해 평소 야곱과 에서의 관심사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명분과 형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오늘 피부로 느껴지는 아쉬움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이걸 가지고 에서가 현재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서의 입장은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에 집중하되 도리와 명분 같은 추상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니까요. 반면 야곱은 에서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바로 그 도리와 명분을 얻지 못한다면 지금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둘째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집안에서의 권리도 그에게는 모두 헛된 것입니다. 오로지 첫째가 되는 명분만이 그의 삶에 의미를 주죠. 이런 서로 다른 방향의 두 욕망이 그날의 죽 한 그릇을 두고 얽히고 말았고 이를 통해 두 사람, 혹은 두 민족의 미래가 결정되었습니다. 묘한 것은 창세기, 나아가 성경 전체가 이 부당해 보이는 거래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장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 야곱, 유다, 요셉, 모세, 다윗과 같은 성경의 핵심 인물들 가운데 진짜 장자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장자’라는 단어를 우월함, 정통, 참된 권위, 지배권과 같은 뉘앙스로 생각하는 우리 통념에 비추어 보면 놀랄만한 일이죠. 성경은 과거로부터 내려왔거나 처음부터 주어져 있던 명분과 권위를 고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붙여진 호칭이나 그가 지금 누리는 지위가 어떤 것인지 보다는 그의 내면에 더 큰 관심이 있죠.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과 명분보다는 마음속 생각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성경이 제시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런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사울과 다윗일 겁니다. 둘 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주셨고, 처음엔 미약했지만 조금씩 왕좌에 접근해 마침내 왕국 전체를 통치할 권력을 손에 넣게 되죠. 하지만 이들의 배경은 사뭇 달랐습니다. 사울은 비록 작은 지파이긴 하지만 베냐민의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서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좋은 체격을 타고난 것에 비해 다윗은 일곱 아들의 막내였고 눈에 띄는 큰 체격도 아니었으며 그저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으니까요. 사울과 다윗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 엘리트와 시골뜨기의 만남처럼 보이는데, 사울은 실패한 왕이 되어 전사하고 다윗은 성공한 왕이 되어 지금까지도 성경 역사에 빛나는 인물로 남았죠. 이들의 인생이야말로 성경이 사람의 조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에서는 여기에 관심이 없는 반면 아무런 자격을 가지지 못한 야곱이 오히려 집착한다는 것이죠.
창세기는 주어지는 조건보다는 획득하는 열매를 더 가치 있게 봅니다. 물론,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려는 야곱의 집착이 본받을 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다만 우리가 가진 복음과 구원의 본질이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창세기가 지지한다고 표현할 뿐입니다. 복음의 결과는 타고난 조건과는 무관합니다. 집안이 좋아서, 외모가 출중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열망이 그분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을 뿐이죠. 그렇기에 스스로 선민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그 어떤 민족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욕망하는 보통의 종교와 달리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복음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