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탕자의 귀향,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탕자의 귀향,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가면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무려 300만 점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 ‘빛의 마술사’로 불린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란 작품이 있다.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큰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바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최고의 화가로서의 명성과 이력과는 달리 개인사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사람이다. 엄청난 작품에 비해, 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인생의 말년에는 끼니까지 굶어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돌아온 탕자’를 그릴 당시에도 그는 큰 불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부인과 사랑하는 외아들이 죽는 고통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그림을 그린 후 얼마 후 죽었다. 평안함이 아닌 최고의 고통 속에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가 나오게 된 것이 아이러니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말씀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만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작품을 접하며 나는 세 가지를 묵상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난 ‘드러난 탕자’, 우리가 잘 아는 둘째 아들이다. 둘째, 이 탕자를 받아주는 ‘탕부 하나님’이다. 셋째, 판단하고 정죄하는 ‘숨겨진 진짜 탕자’,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하지만 진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첫째 아들이다. 세 번에 걸쳐 누가복음 15장의 말씀과 렘브란트의 그림을 연결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먼저, 하나님을 떠난 탕자이다. 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된 ‘탕자의 귀향’ 앞에서 작품을 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울음은 하염없이 뺨을 흘러 내렸다. 350여 년 전, 렘브란트가 죽음을 앞두고 그리고자 했던 둘째 아들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탕자의 옷을 먼저 보자. 권위의 상징인 빨간 망토를 두른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리 둘째 아들은 겉옷이 찢겨진 채 누더기 속옷이 보였다. 그의 험난했던 삶을 보는 듯 했다. 황갈색의 찢어진 옷 역시 그의 삶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가슴에 안긴 그의 머리는 어떤가? 둘째 아들의 머리는 짧게 삭발한 상태였다. 왜 렘브란트는 탕자의 머리카락을 삭발한 것으로 그렸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죄수는 머리카락을 밀어 버렸다. 블레셋 사람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려야만 했던 삼손도 머리가 밀렸다. 바로 죄를 범한 죄인의 극한 수치를 상징하는 듯 하다.

좀 더 내려가 그의 발을 봤다. 샌들이 벗겨진 둘째 아들의 왼발은 상처투성이었다. 오른발의 다 닳아버린 샌들 역시 그의 삶이 얼마나 빈궁했는지를 보여준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어 굶어야 했던 탕자의 비참함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여기서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의 시간표를 좀 더 과거로 돌려봤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두 형제가 있는 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다. “아버지, 죽은 후 제게 돌아올 분깃이 있지요? 그것을 주세요.”

이 요구는 당시의 배경을 볼 때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탕자는 차자이기에 아버지의 재산 중 1/3의 재산 만을 받을 수 있었다(신 21:7). 그것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가질 수 없었다. 물론 예외적인 조항이 있기는 했는데, 아버지가 죽기 전에 받을 경우에는 1/9을 받을 수는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였다는 것이다(신 21:18-21). 결국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라는 말이지 않을까?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이런 요구에 화를 내기는커녕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12절). 아마도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첫째에게 2/3의 재산을, 둘째에게 1/3의 재산을 나눠준 것 같다.

이렇게 아버지의 재산을 받은 둘째는 며칠이 되지 않아 재산을 다 현금화하여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 탕자의 타국에서의 삶은 처음에는 괜찮았다. 엄청난 돈을 가진 그에게 많은 친구들이 몰려왔고, 여자들은 그의 옆에서 온갖 유혹을 하였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탕자를 좋아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진 돈을 좋아했던 것이리라. 그는 세상의 쾌락을 누리면서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많던 재산이 사라진 뒤였다. 돈이 사라지자 그와 평생 함께 할 것처럼 했던 친구도, 여자도 다 떠나버렸다. 돈이 사라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마치 인생의 말년 끼니를 걱정하며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던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율법이 철저하게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곳이었다(레 11:2-8). 더 비참한 것은 돼지가 먹는 밥인 쥐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망가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렘브란트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날렸다. “렘브란트씨, 당신이 비참하게 그린 탕자로 불리는 이 둘째 아들은 누구입니까?” 그 순간 렘브란트의 두 손이 렘브란트 자신과 그의 그림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아내와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죽는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붓을 어쩔 수 없이 놀려야 했던 비참한 모습, 바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이다.

더 나아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고 당돌히 요구하고는 하나님이 주시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버린 이 ‘드러난 탕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던 것이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만들고는 하나님도 들어올 수 없도록 바깥쪽 문에는 손잡이를 없애버린 내가 바로 이 드러난 탕자였던 것이다! 이 절망적인 탕자의 모습은 우리를 철저한 절망으로 이끈다.

그러나, 이 비참한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드러난 탕자’인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깎이고, 옷이 찢기고, 신발이 터져 온갖 상처가 드러나도, 그는 숨기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수치와 약점을 숨기지 않고, 빛 가운데로 드러날 때 우리를 둘러싼 어떤 문제도 해결함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부끄러워도 주님께로 가기만 하면 우리 주님은 그 먼 거리에서도 우리를 알아보시고 달려오셔서 아들 됨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빈손 들고 아버지께로 향해야만 한다. 바로 그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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