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엘세바로의 초대 1
창26:1~26:35
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같은 다른 족장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이삭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매우 적은 분량만을 가집니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이삭은 늘 아브라함과 야곱의 조연으로만 등장하죠. 게다가 아브라함이나 야곱, 요셉처럼 이름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이야기도 없다 보니 이삭의 창세기 속 존재감은 더욱 작기만 합니다.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이삭이지만 창세기 26장에서만큼은 그가 주인공입니다. 이 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삭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삭이 가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영영 알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창26:1~2, 개역개정)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창26:1~2, 새번역)
가나안 땅에 다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사회안전망이 확충되어 있고 산업의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가 아닌 이상 기근은 삶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기근을 피하고자 그 멀리 애굽까지 내려가야 했던 것을 보면 이번 기근도 분명 이삭에게 큰 위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정한 정착지 없이 유목 생활을 했던 이삭이기에 기근 이후 생존을 위해 어디론가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의 선택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이 남쪽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쪽으로 이동 중 그랄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랄에 머무르라는 것이었죠. 이로 미루어 보아 이삭은 애굽까지 갈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죠. 사실 그랄이라는 곳은 이삭에게 그렇게 나쁜 선택지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그랄에 머문 적이 있었던 데다가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협정을 통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도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전할 것만 같았던 그랄 땅이 위기의 땅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창26:7, 개역개정)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창26:7, 새번역)
아버지 아브라함의 활동과 협정,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었음에도 이삭은 그랄 땅에 사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내 리브가의 미모를 그랄 사람들이 탐낸 나머지 가족들에게 위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습니다. 이미 에서와 야곱 두 아이가 있었는데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위협은 강하고 리브가는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물론 창세기가 쓰인 순서와는 달리 이때는 아직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이었을 가능성도 있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행동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미 두 번이나 반복한 실수였던 데다가 그로 인해 어머니 사라와 아브라함의 관계 또한 좋지 않았음을 이삭이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도 이삭은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이 가족의 안전에는 더 유리하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동안은 안전하게 그랄에 거주할 수 있었죠. 다행스럽게도 이삭이 리브가를 안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아비멜렉의 추궁으로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삭의 우려와는 달리 아비멜렉의 적극적인 배려 덕택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아브라함이 뿌려놓았던 씨앗이 생각보다 크게 자라있었음을 이삭이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결과였죠.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26:12~13, 개역개정)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창26:12~13, 새번역)
그랄에 정착한 이삭은 농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늘 유목만을 했던 이삭이 왜 농사를 지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유목생활이 그랄 사람들과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랄 땅에선 양을 키우는 것보다 농사를 짓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겠죠. 어쨌든 아브라함이 전혀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난생처음 해보는 시도였을 텐데, 의외로 농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창세기가 큰 부자가 되었다고 쓴 걸 보면 아마도 이삭의 성품에 농사가 잘 맞아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타지인이 들어와 부자가 되면 원래 그 땅에 거주했던 이들 사이에 반감이 생기기 마련이죠. 과거 소돔 백성이 롯을 경계했던 것처럼 그랄 사람들 사이에서 이삭을 향한 적개심이 싹트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