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걸린 <탕자의 귀향> 속 실패자로 돌아온 아들을 품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렘브란트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탕자 아버지의 손을 오른손과 왼손을 다르게 그렸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인데, 오른쪽 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으로 그린 것이다.
이런 질문이 생겼다. “왜 렘브란트는 탕자 아버지의 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듯이 렘브란트는 탕자의 아버지,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온화함’을 그림 속에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인다. 강함과 온화함, 공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의 두 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 면 만을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보는 것이리라!
특별히 나는 아버지의 눈에서 힘없는 전능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떠나버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타국으로 떠나버린 아들을 아버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가 뭘까? 아버지의 눈은 짓물러졌고, 결국 멀게 되었다. 때문에 <탕자의 귀향> 속 아버지의 시선은 초점이 없었다. 이는 눈이 멀어질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눈물로 밤을 지새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 아버지의 눈을 보며 마음이 크게 울컥해졌다. “왜 아버지는 스스로 이런 나약한 길을 선택한 것인가?”
누가복음이 기록되던 1세기 당시 아버지의 힘은 정말 막강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그 강력한 아버지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아들의 요구에 응했다. 그 강력한 힘줄이 가득한 왼손으로 탕자를 징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약점을 잡힌 것일까? 아니면 탕자의 아버지가 혹시 바보인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탕자의 요구에 ‘살림’(눅 15:12)을 나눠졌다고 하는데, 이 헬라어 단어는 아버지의 무기력하고 나약한, 심지어 측은하기까지 한 행동을 잘 드러내준다. ‘비오스’(βίος)라는 단어인데, ‘생명’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로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탕자의 요구에 준 것은 단순히 그의 재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과 묘하게 연결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선택을 한 아버지는 눈이 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탕자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 먼 사랑을 아들을 기다리다 눈이 완전히 짓물러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아버지의 눈먼 사랑은 놀랍게도 먼 거리에서 거지와 죄수의 형색을 하고, 온갖 악취를 풍기며 다가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눈이 짓눌려진 아버지였지만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으며 잔치를 배설해 주었다.
정말 놀라운 아버지이시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아버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도 황송한데,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 정도가 아닌, ‘아빠’(갈 4:6; 롬 8:15) 아버지라고 말씀한다. 이 아빠 하나님으로 인해 렘브란트는 그 극심한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걸작품을 남겼고, 오늘 우리도 이 고통이 많은 세상에서 용기를 얻게 된다.
21세기의 C. S. 루이스라 불리는 미국 리디머 장로교회의 팀 켈러(Timothy Keller) 목사가 쓴 베스트셀러인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이라는 책이 있다. 팀 켈러 목사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탕자’보다 아버지의 모습에 더 주목한다. 이 아버지를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이라고 명칭했다.
사실 탕자에 쓰인 ‘prodigal’이라는 단어는 ‘방탕한’이란 뜻도 있지만, ‘무모할 만큼 낭비하는’이라는 뜻도 있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낭비하였다.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아들의 권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가락지를 끼우고, 찢어진 종의 신발을 벗기고 새 신을 신기셨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아들을 위해 아낌없이 낭비하는 탕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 탕부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무모할 만큼 모든 것을 낭비하시는 아버지, 바로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그 무모하게 낭비하시는 사랑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까지 죽게 하는 사랑으로 나타났다. 렘브란트가 봤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봤고, <탕자의 귀향> 밑에서 나도 봤고, 또 우리 모두가 발견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저런 인간은 쓸모없고, 저런 사람은 이 땅에서 사라져버려야 해”라고 생각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낭비해 버리는 탕부 하나님의 짓눌려진 ‘눈’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 같이 실수와 실패로 가득찬 인생에게 소망이 있기나 한 거야”라고 생각될 때,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탕부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이 탕부 하나님께 두고 지금 즉시 돌이켜야 한다. 탕부 아버지께로 가기만 하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키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다. 그 아버지께로 가면 아무리 복잡한 문제로 꼬여 있어도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세아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