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엘세바로의 초대 2
창26:1~26:35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창26:16, 개역개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서 떠나가시오. 이제 당신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창26:16, 새번역)
그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움으로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같은 이름이지만 지금 이삭이 상대하고 있는 아비멜렉과는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사이에 맺어졌던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아비멜렉이 공식적으로 그랄 밖으로 나가라는 말까지 했으니 더는 머물기 힘든 상태였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삭은 그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처음 이곳에 올 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3~4, 개역개정)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창26:3~4, 새번역)
이삭이 보기에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약속으로 시작된 인생이라면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결국에는 은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이삭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그 증거였으니까요. 따라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그랄에 정착하는 동기 중 하나이기도 했겠죠. 이를 위해 아내를 동생이라 속여야 했고 원래 하지 않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되었음에도 이렇게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지금 그랄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그랄을 떠날 이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선택은 그랄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적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26:17~18, 개역개정)
이삭은 그 곳을 떠나서, 그랄 평원에다가 장막을 치고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이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버린 것들이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불렀다.(창26:17~18, 새번역)
개역개정의 ‘골짜기’와 새번역의 ‘평원’은 같은 곳을 지칭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표현이죠.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곳으로 옮긴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본래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던 곳으로, 아브라함 사후에 그랄 사람들이 흙으로 메워버린 장소였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팠고, 아브라함이 붙였던 이름을 그대로 되살려 불렀죠. 이 행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삭은 지금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가 경험한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이삭이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가족도 형제도 없는 외로운 처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눌 사람으로는 이복형제 이스마엘이 유일했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이삭이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이었지만, 이삭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위해 몸소 일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셨던 존재였을 뿐 자신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흔적을 복원하며 그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에게도 임하기를 간절히 바랐고, 이것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복원하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창26:20, 개역개정)
샘이 터지는 바람에, 그랄 지방 목자들이 그 샘줄기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다. 우물을 두고서 다투었다고 해서, 이삭은 이 우물을 에섹이라고 불렀다.(창26:20, 새번역)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파기한 것도 모자라 이삭이 다시 판 우물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이런 때에 이삭이 우물의 이름을 아브라함이 지었던 이름에서 에섹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과거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이름을 지금 눈으로 확인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지은 것처럼 우물의 이름은 바로 지금 이삭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이삭이 드디어 세상 속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삭은 결국 에섹을 포기하고 다른 우물을 파게 됩니다. 어떻게든 그랄 사람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우물을 파는 족족 그랄 사람들과 분쟁이 생겨 계속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유목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하는 이삭으로서는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대단히 힘든 모험이었지만 다른 대안이라고는 없었죠.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26:23,25, 개역개정)
이삭은 거기에서 브엘세바로 갔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였다. 그는 거기에 장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거기에서도 우물을 팠다.(창26:23,25, 새번역)
우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새 우물을 파면 또다시 분쟁이 생기는 일을 반복하던 이삭은 브엘세바에 이르러서는 이전과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우물을 파기 전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이죠. 이 장면에서 이삭의 절박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 일이 결국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을 겁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무덤에서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죠.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과 차이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종의 성취를 거둔 이후 예배를 드렸다면 지금 이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힘든 상황에서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그늘에서 벗어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목사님~!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메세지가 담긴 그림사진과 함께 보내주신 ‘성경여행’과 ‘사진여행’ 잘 읽고 있습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은혜의 날 되세요.
축복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