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
내 삶의 활력이 되는 봉사활동
참고 인내하면 기회는 온다

부족하고 작은 믿음을 가졌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장로 임직 받은 지 약 10년을 바라보고 있는 김재영 장로.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길로 인도하셨다. 여러 사정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갈 때 나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포스코인재창조원 김재영 교수를 만나보았다.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김재영 교수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김재영 교수

ㅣ삶의 시선

큰 형을 대신해 맏이 역할 했던 고1 생활
형제들의 우애로 협력해서 견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자란 신앙

Q. 내 인생에 기뻤던 순간은?

가장 기뻤던 순간은 지금 직장인 포스코에 입사한 것이다. 그 당시도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울 때였는데 다행히 포스코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상당히 기뻤다. 1985년에 입사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7년에 결혼하게 됐다. 내가 입사하기 전 다녔던 천안의 모교회 사모님의 소개로 아내를 맞이하게 됐다. 나보다 믿음이 신실한 아내를 만난 것이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한 후 1988년에 큰 딸이 생겼을 때 기뻤다. 물론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도 기뻤지만 그땐 일본에 유학 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없다는 것이 좀 아쉽다.

김재영 교수의 가족사진. 김재영 교수는 인생의 가장 기뻤던 순간을 지금 직장인 포스코에 입사했을 때, 아내와 결혼했을 때, 큰 딸이 태어났을 때를 꼽는다.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도 기뻤지만 그땐 일본에 유학 가 있었다. 아내는 김재영 교수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출처=김재영 교수
김재영 교수의 가족사진. 김재영 교수는 인생의 가장 기뻤던 순간을 지금 직장인 포스코에 입사했을 때, 아내와 결혼했을 때, 큰 딸이 태어났을 때를 꼽는다.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도 기뻤지만 그땐 일본에 유학 가 있었다. 아내는 김재영 교수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출처=김재영 교수

Q.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때가 힘들었던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가 살았던 곳은 시골이었다. 전기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어왔다. 그 정도로 아주 산간벽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농사도 조금밖에 안 짓는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게 됐다. 그때가 상당히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3살 차이 나는 형이 있다. 형은 군대 가기 전에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형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형에게 "시골로 내려와서 농사지으면 안 된다. 미래가 안 보인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보니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맏형 역할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가 힘들었다.

Q. 그 당시 나에게 한 마디

"잘 살았다.", "잘 견뎠다." 그리고 "형제들이 다 우애가 좋으니까 협력해서 잘 살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고생하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Q.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계기는?

사실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은 늦은 편이다. 나는 군대를 갔다 와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것 같다. 그 당시에 교회 간다고 하면 여러 가지로 반대하는 부모님도 있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왔더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큰형까지 전부 교인이 되어있었다. 하나님이 복을 많이 부어주신 것 같다. 알고 보니 막냇동생이 학교 다니면서 친구 따라 교회를 가게 됐고,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거기서 위로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누나를 전도했고, 또 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그다음에 형을 전도해서 가족 전체가 믿는 집이 됐다. 그러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했으니 나에게는 큰 행복이자 행운이었다.

나의 신앙은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으며,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교회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가끔가다 주일만 교회를 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결혼을 했는데 아내의 신앙심이 상당히 좋았다. 아내는 교회학교 교사도 했었다. 주일이 되면 아내가 계속 "교회 가자"라고 하니까 따라갔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나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안수집사가 되고, 기관 회장도 하다 보니 장로로 피택을 받게 됐다. '나는 그릇이 안되는데'하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럴 때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광양대광교회 신정 목사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참 와닿았다. "그릇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 앞에 그릇이 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데 그걸 하나님이 시키는 거니까, 맡기는 거니까, 그걸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릇은 나중에 키우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힘을 얻어서 임직을 받게 됐다. 받고 보니 여러 보는 눈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술도 먹었다. 그런데 이제 '장로'가 됐다는 걸 주위에서 아니까 술도 권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게 은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더욱 신앙을 갖고 믿게 됐다. 참 감사하다. 

피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피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ㅣ사역의 시선

기술교육과 다양한 강의로 후학 양성 
코로나19로 할 수 없는 봉사활동 아쉬워

Q. 지금 맡고 있는 사역/일

일단 교회에서 하는 사역은 광양대광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요양원을 섬기고 있다. '아로마 요양원'이다. 요양원 어르신들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서 진행을 담당하고 있다. 앞에서 기타 치고 찬양을 15분 정도 하고 그다음에 목사님을 초빙해서 설교를 듣는다. 휠체어로 모셔오고 모셔가고 이런 봉사를 쭉 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코로나로 요양원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하고 있다. 기타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김재영 교수는 광양대광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요양원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사역을 해왔다. 현재는 코로나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김재영 교수
김재영 교수는 광양대광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요양원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사역을 해왔다. 현재는 코로나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김재영 교수

회사에서 맡고 있는 일은 기술교육그룹에서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 속에는 계측 제어라고 해서 온도, 유량, 압력, 레벨 이렇게 나눠져 있고 온도를 측정하고, 레벨을 측정하고, 압력을 측정해서 측정값으로 목푯값을 맞추는 그런 제어 시스템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또 포스코 기술대가 개교한지 8년 정도 됐는데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거기서는 센서 공학이라는 분야로 센서의 원리와 사용법 이런 것들을 강의하고 있다. 또 지역 근방에 있는 대학에서 전자공학개론 강의를 하고 있다. 가끔 자격증과 관련된 강의도 하고 있는데 기계정비산업기사라든가, 압연 기능사 이런 강의도 중간중간 하고 있다.

또 2016년도에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단 소속 교수로 임명됐다. 그동안 중소기업은 교육받는데 어려웠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인데 강사를 확보하기 어려운 곳에 강의를 하고 있다.

신입직원들과 IoT실습을 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코로나 이전 사진) @출처=김재영 교수
신입직원들과 IoT실습을 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코로나 이전 사진) @출처=김재영 교수

Q. 강의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는?

많은 일화가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아마 기술교육팀으로 일하게 된 초창기였던 것 같다. 신입사원들이 오면 '인턴'이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인턴들을 교육하는 과정 속에 걷기 훈련이라는 것이 있다. 체력 극기 훈련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양에 유명한 산이 있다. 아마 다들 알 것이다. '백운산'이라는 산인데 조금 높은 산이다. 국립공원이고 백운산을 종주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 능선을 따라 돌면 한 16km 정도 된다. 진틀이라는 곳에서 올라서 정상을 거쳐 회사에서 운영하는 백운산 수련관까지 가는 것인데 16km 정도 되고 시간상으로 6시간 정도 걸린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6,70명 정도 됐다. 혼자서 리드하기 힘드니까 항상 두 분 정도 교수들이 함께 갔다. 선두, 중간, 그리고 뒤에 오는 인턴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3명이 각각 위치를 맡아서 진행한다. 그때 나는 두 번째 라인에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두에 섰던 교수님이 바꾸자고 했다. 왜 바꾸자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바꿔서 내가 선두가 되었다. 나는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백운산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능선이라고 해도 가다 보면 왼쪽으로 빠지고, 오른쪽으로 빠지고 하는 부분이 많다. 그걸 잘못 빠져서 왼쪽으로 빠졌다. 원래는 오른쪽으로 빠져야 했다. 내 뒤에 한 20명 정도를 인솔하면서 가는데 엉뚱한 데로 가게 됐다. 원래대로 하면 백운산 수련관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샤워하고 집합해서 버스를 타고 와야 하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니 길이 없었다. 가다 보니 갑자기 중간에 길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위들이 많이 있고, 암벽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내려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늦어지고 '어차피 내려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라는 생각에 할 수 없이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숲이 울창해서 캄캄해졌고 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떻게 이 친구들을 안 다치게 내려갈까'라고 걱정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이게 극기 훈련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한편으로는 '됐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옮기지?'라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너무 진땀이 났다. 중간에는 핸드폰도 안됐다. 다행히 시간은 걸렸지만 한마을에 도착하게 됐고 통화해서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다. 그때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으로 강의를 진행했지만 현재는 온라인 ZOOM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김재영 교수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으로 강의를 진행했지만 현재는 온라인 ZOOM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김재영 교수

Q. 많은 자격증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계속 도전하게 된 계기는?

사실, 같이 기술교육하는 교수님들에게 비하면 많은 게 아니다. 오히려 적은 편이다. 

나는 입사해서 약 20년 동안 기술원으로 생활하다 보니 기술 자격증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어학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사실 어학적으로 상당히 많이 공부했다. 내가 일본에 가게 된 이유도 일본어를 잘해서 가게 된 것이다. 연수와 유학으로 한 2년 6개월을 일본에서 살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시험을 봤는데 JPT 1,000점 만점에 930점 맞았다. 그게 계기가 돼서 '일본어를 전공해볼까?'하는 생각에 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하고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원자격증을 따게 됐다. 그 대신에 기술 자격증은 많이 못 땄다. 요즘은 영어에도 취미가 생겨서 스피킹 6급 정도는 갖추게 됐다.

또, 회사에서 전체적으로 따라고 해서 기계정비산업기사 자격증이 있다.

이제 곧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5년 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한 것이 있어 계속 자격증에 도전하게 된 이유도 있다. 사실 은퇴를 하고도 용돈벌이는 하고 싶다.(웃음)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직업훈련교사 자격증 7개 정도 있다. 최근에 압연 기능장이라는 자격을 하나 취득했다. 그거 딸 때 고생을 좀 했다.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나보다 전에 자격증을 많이 따신 분이 "포기만 안 하면 딴다. 시기가 조금 늦을 뿐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나도 포기하지 않고 자격증 공부를 계속했고 2년 만에 합격했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 성공의 반대는 포기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사설 민간에서 운영하는 자격증도 있는데 그게 한 12개 정도 있다. 웃음치료사, 마술 레크리에이션, 인성지도, FUN 리더십 등등 12개 정도 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하는 것보다 뭔가 배워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간자격증도 취득하게 됐다. 은퇴하면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봉사활동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지만 준비된 자가 행운을 만나면 성공이라고 했으니까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언젠가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올 때를 위해서 차곡차곡 준비하면 반드시 원하는 게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Q. 많은 취미생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한다. 입사해서 첫 월급을 어머니에게 선물해야 하는데 테니스와 야구를 하려고 스포츠 용품을 샀다. 그래서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운동을 좋아한다. 그래서 동생과 캐치볼을 했고 테니스는 입사하고 10년 정도 테니스를 했었다. 그 뒤에 골프 붐이 일어서 골프에 도전하게 됐고 한 10년 정도 했다. 그런데 골프는 시간이 많이 소요됐고 자꾸 욕심이 생기니까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과 탁구장에서 탁구를 했다. 코로나로 탁구는 못하고 있다. 또 테니스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허리가 아파서 고쳐보려고 요가도 했었다. 

코로나 때문에 새로 생긴 취미가 있는데 바로 화초를 기르는 것이다. 코로나로 재택근무와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 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다. 그래서 화초를 기르면서 하나하나 사진을 찍는 것이 재미있다. 사진을 찍다 보면 평상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사진을 디테일하게 꽃 중심으로 찍는다든가, 어떤 거 하나를  포커스 인해서 찍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그게 너무너무 신기했다. 꽃들을 살피고 보면서 '내 인생도 어떻게 보면 꽃 피는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고 그 느낌을 시로 쓰게 됐다. '디카시'라고 하는데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서 시를 5행 이내로 아주 짧게 쓴다. 요즘엔 길면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5행 이내로 디카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한 70편 정도 될 거 같은데 시와 수필을 합쳐서 기회가 되면 책을 한번 내보고 싶다.

김재영 교수가 직접 사진을 찍고 시를 쓴 디카시 @출처=김재영 교수
김재영 교수가 직접 사진을 찍고 시를 쓴 디카시 @출처=김재영 교수

ㅣ생각의 시선

은퇴 앞두고 제2의 삶 준비
근무지 변경으로 시작된 새로운 분야 접해
열정 전도사, 행복 전도사로 기억되고파

Q.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내가 포스코를 1985년에 입사해서 현재까지 36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제 마무리 단계이다. 여태까지 건강하게 잘 근무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옛날 같으면 은퇴하면 그냥 은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100세 시대니까 은퇴해서도 뭔가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5년 전부터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서 자격증도 취득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여태까지 해왔던 것 중에 가장 소질 있고 잘 맞는 부분이 강의하는 것이다.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싶어서 그 목표를 향해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은퇴를 하면 일은 지금보다 반만 하고 나머지 반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 지금도 여러 봉사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최근엔 트롯 노래를 배워서 마을회관이라든가 노인정, 요양원, 유치원 이런 곳을 다니면서 어르신들이나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 남들이 즐거운 것을 보면 나도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직접 찾아가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 만든 것이 해안가 청소 봉사단을 만들어서 열심히 청소하고 있다. 이렇게 은퇴해서도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가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재영 교수는 코로나 이전에 노인정을 방문해 어르신들 앞에서 마술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출처=김재영 교수
김재영 교수는 코로나 이전에 노인정을 방문해 어르신들 앞에서 마술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출처=김재영 교수

Q.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는데 그만두고 싶으셨던 적은 없었나?

솔직히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입사하고 만 5년 6개월 정도 됐을 때 현장에서 반장직을 수행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빨리 승진했다. 반장을 수행하면서 주임과의 갈등이 있었다. 내가 반원이었을 때는 중간에 반장이 있으니까 직접 주임과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랬는데 내가 막상 반장이 되니 주임하고 직접 할 일이 많았고 거기서 의견 차이가 생겼다.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꼰대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갈등이 있고 부딪히면서 '내가 이 상태로 스트레스 받으면 오래 못 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고 소화 기능이 많이 나빠졌었다. 그래서 솔직히 공사 계통의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려고 알아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회사에서 대리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리 회사는 수행하는 업무에 따라 E직군과 P직군이 있는데 나는 E직군이었다. E직군은 기술적으로 현장직을 수행하는 업무를 하고, P직군은 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사무업무를 수행한다. 대리시험은 E직군 중에서 어학능력이 좀 특별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시험을 보는 제도였다. 그 시험에 합격하면 E직군이라도 P직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제도이다. 한 과장님의 권유로 시험을 봤는데 첫 번째에 합격했다. 지금은 직책 호칭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엔 주임 바로 위가 대리였다. 그래서 내 직책이 대리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탈출하는 계기가 됐다.

중간에 나도 사표를 내려고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걸 잘 견딘 것 같다. 잘 견뎌서 지금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다. 누구에게나 다 힘든 과정이 있고, 고비가 있다. 그 고비를 어떻게 슬기롭게 견디느냐,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디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Q. 책을 쓰셨다고 들었는데 계기가 무엇인가?

2011년에 교육부서인 기술교육그룹으로 전입되어 직원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다. 신입사원들에게 강의를 하면 하루 종일 8시간을 하는데 계측 제어 부분의 온도, 유량, 압력, 레벨 이런 것들을 검출하고 제어하는 쪽을 하다 보니 재미가 없다. 똑같은 기술 강의만 하면 너무 따분하다. 그래서 '어떻게 즐겁고 재밌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인성 교육도 하게 됐다. 그때까지는 어학공부, 기술 공부만 하다 보니 인성교육에 아는 것이 없어서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래서 3년 동안 120권을 읽었다. 그런데 그냥 읽으면 다 잊어먹게 됐다. 그때부터 읽었을 때 느꼈던 점, 느끼고 배우고 싶은 것들 이런 내용을 쭉 정리하면서 내 생각도 집어넣고 이런 식으로 읽을 때마다 파워포인트로 작성을 했다. 신입사원들에게 인성 교육을 할 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료를 만들고, 인성 교육을 시키고 하다 보니 어느새 파워포인트가 500장이 넘어가게 됐다. 

교육과정 중 신입사원들과 독서토론을 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출처=김재영 교수
교육과정 중 신입사원들과 독서토론을 하고 있는 김재영 교수. @출처=김재영 교수

어느 날 '다른 사람을 인용해서 교육해도 좋지만 내 책을 이용해서 강의하면 이게 더 효과가 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은 자료에다 나의 생각을 더 엮으면 좋은 책이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책을 집필하고 출간하게 됐다. 이 책을 신입사원들이 읽고 독서 토론도 한다. 그동안 이 책을 3쇄까지 출판했다. 2년 전에 4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멘토링 역량 향상 교육과정이 새로 생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멘토링 역량 향상을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요새는 안전을 중요시해서 안전기술교육은 해봤지만 멘토링 역량을 교육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니까 하겠다고 했다. 

몇 달 동안 준비하는데 걱정이 됐다. 그래서 멘토링과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멘토링이란 그냥 인간의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태어나 신생아 때는 어머니가 멘토가 된다. 아버지가 멘토고, 누나가 멘토가 된다. 그러다 동생이 생기면 내가 또 멘토가 되고 자라면서 멘토, 멘티가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인생이 멘토링인 것이다. 그래서 멘토링은 전에 썼던 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읽었던 멘토링 관련 책과 강의하던 내용을 정리해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내용으로 '행복한 멘토링 길라잡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됐다. 4월 1일 출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김재영 교수가 출판한 책. 처음으로 출판했던 책 '작은 성공 큰 행복'(왼쪽)을 4쇄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용을 보충해 두 번째 책 '행복한 멘토링 길라잡이'(오른쪽)를 출판했다.
김재영 교수가 출판한 책. 처음으로 출판했던 책 '작은 성공 큰 행복'(왼쪽)을 4쇄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용을 보충해 두 번째 책 '행복한 멘토링 길라잡이'(오른쪽)를 출판했다.

Q. 묘비명에 쓰였으면 하는 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열정'이다. 그래서 '열정 전도사'라고 쓰이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열정이 샘솟는다 할 정도로 그런 느낌을 주면 좋겠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회사에서 2년 동안 유학을 보내줘서 갔다 왔었다. 그 후 우리 부서에서 후배 4명이 연수나 유학을 가게 됐다. 사실 가기 어려운 건데 나의 모습을 보고 '어, 저 선배도 가는데 나도 노력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열정 전도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지금부터 더 노력할 부분인데 "나를 알게 돼서 행복했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래서 '행복 전도사'라는 글이 옆에 쓰였으면 좋겠다. 

'열정 전도사' & '행복 전도사' 이게 나의 소원이다.

l세상의 시선

꿈을 갖고 준비하는 청년들 되길
시간은 걸려도 준비하면 기회가 온다

Q. 세상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은?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스도인으로 참 선하게 살았다",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라고 듣고 싶다. "나를 롤 모델로 삼아서 삶이 바뀌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책을 쓸 때도 그랬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성공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면 보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포스코 봉사단으로 활동하면서 봉사 인증패를 수여받은 김재영 교수. @출처=김재영 교수
포스코 봉사단으로 활동하면서 봉사 인증패를 수여받은 김재영 교수. @출처=김재영 교수

Q.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일단 2부분으로 나눠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나처럼 은퇴를 앞둔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 내가 교육관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주위에 은퇴하는 선배들을 보게 된다. 그중에는 준비를 많이 하신 분도 있고, 준비를 전혀 안 하신 분도 있다. 준비를 많이 하신 분들은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목표를 향해서 준비하고, 그 준비한 대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사시는 것을 보게 됐다. 반면에 준비를 안 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뭐 준비하면 세상이 바뀌냐? 달라지는 게 있어? 42년을 했는데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집에서 뭐가 다 준비해 주겠지."라고 농담으로 말씀하셨다. 1년 정도 지나고 나니 주위에 동기들은 또 다른 직장에 나가는데 본인은 혼자 놀다 보니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또 자격지심이 많이 든다고 했다. 꼭 '능력이 없어서 취직을 못하는구나'라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미리 준비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면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본다. 이런 건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다. 퇴직까지 5년 정도 남았다면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꿈을 가지면 좋겠다. 꿈을 갖고 그 꿈을 향해 실천하면 좋겠다. 그래서 꿈을 세워놓고 꿈에 도달하기 위해 세부적인 목표를 정해서 그걸 하나하나 차근차근해보면 어떨까 한다. 청년 때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꼭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전망이 있는 중소기업이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택하면 좋겠다. 봉급은 부족해도 미래가 있는 직업이 있다. 본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취직을 하고 거기서 또 꿈을 갖고 그 꿈을 향해 근무할 수 있다. 나도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사실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하면서 계속 공부를 했고, 지금은 교수직을 맡게 됐고 강의를 다닌다. 결국 목표 기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은 나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준비만 하면 언젠가 그 기회가 올 수 있다.

김재영 교수는 늦은 나이에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원자격증을 따게 됐다. 김재영 교수는
김재영 교수는 늦은 나이에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해서 교원자격증을 따게 됐다. 김재영 교수는 "목표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하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라고 말한다. 졸업식에서 김재영 교수 부부. @출처=김재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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