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나님의 장난감인가

 

‘만약 하나님이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선이다.’ 좀 오래전 일인데, 목사님 한 분과 신학대학 교수님 한 분, 그리고 필자의 셋이서 환담을 나누다가 무엇인가 말끝에 필자가 한 말이다. 목사님은 동감이라 했고, 교수님은 아니라 했다.

‘만약’이라는 말이 붙은 가설이기는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지칭하여 ‘악을 행한다’ 하다니 사랑의 하나님을 보고 잔인하다 한 말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은 소리이다. 자신이 한 말을 가지고 정말이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라냐 할 사람도 있을 것이나,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아니 강조하려고 일부러 억지를 부려 본 것이다. 환담자리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선하지 않고 사랑이 아닌 일이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하시고 모두가 사랑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희로애락을 느끼시는 감성의 소유자이시다. 아니 우리 인간들보다 더 예민한 감성으로 기뻐도 하시고 슬퍼도 하신다, 노여워도 하시고 즐거워도 하신다. 그러나 선을 행하실 뿐, 악한 일은 하시지 않는다. 사랑을 베푸실 뿐, 무자비한 일은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자비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 의한 것이다. 그럼 인간이 인간의 관점에 의하지 무슨 관점에 의하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은 항상 오류투성이이다. 무엇이 됐던 그 기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야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면 안 되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지음을 받아 이 땅에 왔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며 사는 삶,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냐 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난감이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인격체이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의 인격을 나누어 받은 인격의 인격체이다. 우리의 각자가 안에 품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의해 형성된 인격으로서의 인격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인격체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런 삶이 그분 하나님께서 향기롭고 기쁘시게 받으시는 산제사요 예배이기도 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부나비는 왜 불로 달려드는가

 

인간에게 있어 영혼의 구원을 제외하면 행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좀 더 나은 행복을 위해 돈도 모으고 명예나 지위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일이라면 부나비가 불을 보고 달려들 듯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해 유흥장을 찾고 술도 마시지만, 그리하여 남는 게 무엇인가. 그게 과연 행복인가. 그게 행복이라면 크게 실례되는 말이지만, 배부른 돼지의 그것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인간의 참 행복은 창조주의 창조섭리에 따라 사는 데에만 있다. 그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물을 양수기로 낮은 데에서 높은 곳으로 끌려 올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는 데에는 작지 않은 힘이 들뿐 아니라 한계가 있다. 창조섭리를 거스르며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꼭 그렇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의 말씀으로 인간의 참된 안식은 그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안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앞에서 이미 제시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 나의 인격으로 하여 사는 것이라는 것도 말했다. 달리 표현하면 성삼위 하나님을 자신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아닌 사람도 있나

 

사람들은 이미 사람인 사람을 보고 ‘사람 좀 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격을 좀 높여 가지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됨은 인격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격 높은 사람을 가리켜 고상한, 또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하는데, 인간을 향한 최고의 찬사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인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오직 돈, 돈이다. 아니면 명예와 지위 같은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고매나 고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은 자신의 인격을 높일 수가 있다. 무엇으로, 어떻게? 말로이다. 말을 품위 있게 해서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예수의 말씀이다. 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한 음식은 배탈은 나게 할지라도 먹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배탈 난 사람을 더럽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저분한 말을 남발하는 사람을 보고는 입이 지저분하다고 하는데, 실은 입이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사람 자체가 지저분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마15:19-20 참조).

그렇다면 나의 인격은 어떠할까. 어느 정도일까. 고매하고 고상할까, 보통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것일까, 저질은 아닐까. 아마 자기의 인격을 고매하다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저질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대개가 남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사람들의 평가가 다 옳은 것만은 아니다. 심사임당의 평가가 다르고 뺑덕어멈의 그것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임당까지는 아닐지라도 이웃의 보통사람들 말이라면 믿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누가 나에게 직접 그것을 말해 주겠는가. 그게 부정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격을 만들어 가는 수밖에.

어떻게? 그건 자기성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도하며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그런 자기성찰 말이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마음속의 나를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게 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임이 틀림없으니 더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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