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많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게도 ‘운명론’에 묶여 살고 있는 것 같다. ‘운명론’이란? 자신을 과거에 묶어버리고 그것에 얽매여서 사람이 가지는 이상이나, 꿈같은 것을 없애 버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이전의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 내 안의 사슬을 끊고 풀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과거의 상처나 잘 못된 것들이 나를 묶고는 자신을 ‘운명론’에 굴복하게 만든다.
코끼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무게의 몇 십 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에게 조종을 당하며 살고 있다. 이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린 코끼리를 유인하여 우리에 가두고 발에 굵은 쇠사슬을 채우고 쇠사슬을 굵은 나무에 묶어둔다. 어린 코끼리는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렇게 여러 번 하다가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코끼리는 후천적 무력감을 학습하게 됨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의 길이를 넘어서지 못함을 알고 자신의 행동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어른이 된 코끼리는 사슬이 아닌 가느다란 밧줄로 작은 나뭇가지에 묶어놔도 도망가지 못한다.
사람들도 코끼리처럼 스스로의 안에 있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들에 묶여서 한계에 점점 익숙해져서 익숙한 곳이나 일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작은 사슬에 묶인 채 길들여 사는 코끼리로 살 것인가? 아니면 말뚝을 뽑고 자유를 누릴 것인가? 선택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런 ‘운명론’을 이기며, 싸우며 나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 라고 사전에서는 뜻을 풀이했다. 즉, 부름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맡겨준 것이나 해야만 하는 일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고 기쁜 일이다. 이 사명에 대하여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유대교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신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하나님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결단을 내린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든지 아니면 죽이는데 동참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자신의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서 죽이고, 옥게 가두는 것이 성에 차지 못해서 다른 나라에 까지 가서 잡아오려고 가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박해자요, 포악자였던 그가 바꾸어져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를 전하던 그가 자신에 복음전도를 말 할 때 ‘목숨을 바치는 것’ 으로 표현했다. 즉, ‘사명’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복음을 전하는데 다 놓았다.
짐 엘리어트라는 1950년대의 유명한 선교사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그가 정글에서 피 흘리고 순교한 일기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즉,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그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우리들도 짧은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해 낼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게 되는 것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사명’을 찾기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비워야 한다. 가끔 흔들리기도 하고 흔들리면서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아픔으로 인한 흐르는 눈물을 흘러 보내기도 해야 한다. 오히려 숨기려고 하다가는 괜한 또 다른 아픔을 낳게 된다. 이렇게 비워내야 하는 것이다. 물은 고이면 썩기 시작한다. 작고, 아무런 값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의 아픔들이 나로 절망을 가질 때까지 굳이 자신 안에 쌓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아직 삶이 흔들리고 아직도 흘릴 수 있는 눈물이 남이 있다면 아직도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 희망이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들리기는 하되 허물어 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 견디어 내고 내 마음의 것을 자꾸만 비울 때 나도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비우는 것만큼 사람은 채워지는 것이다. 무엇을 채우기 위해서 비우려고 하지 말고 내 안을 내 것으로부터 비워 갈 때 또 다른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비워야 채워진다. 오늘도 주님과 세상은 나로 하여금 자꾸만 비우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이기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믿음으로 이기라고 하신다. 그러기에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지면 지는 것이다. 이기며 나가야 한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를 아는가?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다. 가족을 부양하기가 힘들어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장성해서도 그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 한지 1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다. 그는 무려 2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 명이 열 살 전에 죽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녀 중에 하나는 정신박약아였다. 그리고 그는 노후에 더욱 불행하였다. 그는 시력을 잃었고,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통하여 고난을 이기며 불후의 명작과 명곡을 썼다. 그런데 그의 작품마다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썼으며, 마무리에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썼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의 곡을 듣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영광스런 바하는 알지만 바하가 이렇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바하가 이런 모진 고난을 이겨낸 것은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비참한 인생 속에서도 감동을 받는 것이다. 고난은 무익한 것만도 아니다.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 그리고 더 깊게 더 높게 성숙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붙들고 있는 것들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찬란한 기대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고 자신이 이겨낸 시간들을 감격스럽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둥둥 띄어 보내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일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목숨을 걸고 해 내고 싶지는 않는가? 시산은 오늘이다. 아니 지금이다. 찾았으면 전진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