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과 기만3. 27:1-46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27:34, 개역개정)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에서는 소리치며 울면서, 아버지에게 애원하였다. “저에게 축복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저에게도 똑같이 복을 빌어 주십시오.”(창27:34, 새번역)
에서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이것을 되돌리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이미 내린 축복은 거두어질 수 없었습니다. 만일 자신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고 이를 알게 된 야곱이 에서에게 울며 축복을 나눠달라고 간청했다면 에서는 야곱에게 양보하고 싶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겠죠. 이미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거두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에서에게 줄 것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죠.
…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27:39~40, 개역개정)
…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창27:39~40, 새번역)
에서에게 준 것들은 야곱과는 정확하게 반대의 것들입니다.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하늘 이슬에서 멀어진다는 말은 농경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니 사냥을 업으로 삼았던 에서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우를 섬기게 된다는 것, 바로 리브가에게 주어졌던 그 예언이 재확인되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었죠. 다행스러운 대목은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예언과 함께 이것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약속도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에서가 받은 진짜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에게 장자로 인정받은 동생을 섬겨야 한다는 멍에는 가혹한 것이니까요. 누구나 고통과 환란이 없는 삶을 꿈꾸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반드시 끝나는 날이 온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 되겠죠.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창27:42~43, 개역개정)
리브가는 맏아들 에서가 하고 다니는 말을 전해 듣고는, 작은 아들을 불러다 놓고서 말하였다. “너의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나의 아들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제 곧 하란에 계시는 라반 외삼촌에게로 가거라.(창27:42~43, 새번역)
어쩌면 리브가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주고 나면 에서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헷 사람과 결혼해 부모를 실망시켰고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기까지 했으니 더는 할 말이 없을 거라 여겼을 수도 있죠. 그냥 평소처럼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사냥이나 다니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에서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야곱에게 분노한 것을 알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죠. 장자고 뭐고 야곱의 목숨을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것조차도 야곱 스스로 하지 못해 리브가가 나서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이삭과 야곱을 설득해 위급한 상황을 넘기려 했죠.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창27:46, 개역개정)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하였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사는 게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딸들 곧 헷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아들인다고 하면, 내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창27:46, 새번역)
실제로 리브가와 며느리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붓감을 찾기 위해 야곱을 라반에게 보내야 한다는 주장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사람을 보내 신부를 데려오는 방법도 있었고, 그 자신도 그렇게 고향을 떠나서 이삭과 결혼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야곱의 나이가 일흔이 훨씬 넘었음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신부를 찾으러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브가에게는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어떻게든 이삭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녀가 뿌린 씨앗이 저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야곱은 물론 며느리와 손주들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죠. 게다가 이후로는 사랑했던 야곱이 아니라에서, 그리고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며느리들과 살아야 했으니 참으로 안 된 일이죠. 하지만 리브가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이제 광야로 내몰린 신세가 된 야곱은 어머니라는 보호자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