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제일교회 원로 류호승 장로
전통있는 문중의 장손에서 믿음의 첫 열매로!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

장로 은퇴 후, 선교지에 마르지 않는 축복의 터전 세워

경기도 시흥. 고즈넉한 마을 중턱에 위치한 고택에서 만난 류호승 장로는 자신을 과거와 현재를 함께 공유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역사와 전통있는 집안의 장손으로 자라나 믿음의 개척자로, 온 집안을 복음으로 물들이며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류호승 장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겸손한 그의 모습에선 신앙인으로서의 강인한 기개가 엿보였다. 은퇴 후 해외 선교에 집중하며 그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류호승 장로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믿음의 개척자로,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 온 류호승 장로의 삶과 신앙, 사역 이야기를 만나보자.
믿음의 개척자로,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 온 류호승 장로의 삶과 신앙, 사역 이야기를 만나보자.

ㅣ삶의 시선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의 종손
꿈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 "불쌍한 것... 나에게 오라"
예수 영접 후, 집에서 쫓겨나고 장자권 빼앗기는 수모 겪어

믿음의 개척자로 온 가족 전도 돼 찬양의 메아리 울려 퍼져

Q. 장로님의 삶을 하나의 장르로 표현한다면?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아왔다. 어떤 장르로 표현하기 어렵다. 40년을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로 살던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나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나 역시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왕자처럼 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핍박과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으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고 있다.

Q. 사대부 집안의 손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문화 류씨(文化柳氏) 집안이다. 경기도 시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장인으로 영의정과 병조판서 등 문신을 지낸 류자신 선생이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우고, 최고 관직을 지낸 이들을 상신록, 공신록 등에 기록했는데 명부에 1명만 들어가도 사대부 집안이라고 불렀다. 문화 류씨는 5명이나 공신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와 전통이 뿌리 깊게 자리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택. 현재 류호승 장로와 가족들이 살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택. 현재 류호승 장로와 가족들이 살고 있다.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장인으로 문신을 지낸 류자신 선생의 묘. 현재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장인으로 문신을 지낸 류자신 선생의 묘. 현재 시흥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Q. 왕자처럼 자랐다고 했는데, 어떤 삶을 살았나?

아버지가 서기관을 지냈는데 지금과 달리 예전에 서기관 하면 고급 공무원이었다.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대단했고 상당한 부를 누렸다. 당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3명의 누님들 모두 대학을 다녔을 정도였다. 어릴 적에는 또래 친구들이 집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호승아!”라고 불렀다간 머슴들에게 끌려가 혼쭐이 났다. 아버지 뻘의 어른이 늘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불과 5-6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웃음) 그리고 일 년에 13번 제사를 지내며 사대부 집안의 장손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배웠다. 할머니는 늘 나에게 "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나를 짓눌렀다.

Q. 교회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는데, 어떤 계기로 교회를 가게 되었나?

39세 때까지 교회를 가 본적이 없다. 집안 사람들은 물론 친구들도 교회 가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이란 존재도,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교회 앞마당이 아닌가. 술을 먹고 밖에서 잠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황당할 뿐이었다. ‘왜 하필 교회를 왔을까? 재수 옴 붙었네’하고 툴툴거리며 그 자리를 떴는데 정확히 3일 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 생겼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10월 23일 새벽 3시경 꿈을 꿨다. 대문 앞에 앉아 산을 보는데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한바탕 비가 내리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커먼 구름 사이로 구멍이 생기더니 그 사이로 찬란한 빛이 내려왔다. 눈이 부셔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금빛 찬란한 옷을 입은 한 형상이 양팔을 벌려 나에게로 다가왔다.

광채로 인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불쌍한 것... 내 손을 잡아라, 나에게로 오라”하고 말을 했다. 두려운 마음에 집 안으로 피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그 순간 소리를 '악' 지르며 꿈에서 깼다. 그런데 옆에서 자던 아내도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나와 똑같은 꿈을 꾼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왜 이런 꿈을 꿨을까’ 밤낮으로 생각했고, 3일 전 교회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하나님께 벌 받는 거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교회로 향했다. 그렇게 교회의 문턱을 넘었고 그 교회가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부천제일교회다.

Q. 놀라운 경험이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인가?

그날로 교인 등록을 하고 교회 생활을 시작했다. 열심히 다니긴 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권사님의 손에 이끌려 한얼산기도원을 가게 됐다. 난생처음 가본 기도원이 영 익숙지 않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꿈을 꾸게 됐는데 기도원에 불이 났다. 다들 도망치는데 나 혼자 앞으로 가 불을 쬐는 것이 아닌가. 꿈이긴 했지만, 불이 너무 뜨거워 실제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 뜨거움에 잠을 깨서 보니 내 앞에 예수님의 자화상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집회에 참석해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데 정확히 몸을 반으로 나눠 왼쪽 전체에 마비 증상이 왔다.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놀란 나머지 옆에 있던 분들이 나를 들고 강대상 앞으로 갔다. 그때 한얼산기도원 이천석 목사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그 물음에 나도 모르게 “네 믿습니다” 대답을 했다. 그렇게 안수기도를 받고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비 증상이 싹 사라졌다. 치유된 것 뿐 아니라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집회 참석자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는데 허공에 찬양 가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부른 찬양이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때가 교회를 다닌지 100일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성령 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Q.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류씨 문중으로서 지켜온 전통과 관습에 반하는 내 모습에 부모님은 물론 친척, 집안 식구들 모두 나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회 다니더니 미쳤다"라는 말을 했고 아버지께서는 예수 믿는 자식 필요 없다며 집안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딸이 있는 나를 제쳐 두고 아들이 있는 동생에게 장자권과 제사권, 재산권을 넘겨주는 등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동생의 하나뿐인 아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어가야 할 조카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조카의 장례를 치르고 동생을 붙들고 말했다. “너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아들을 주실테니 형을 믿고 같이 교회 한번 나가자.” 부단히 동생을 설득했고, 그렇게 교회를 나간 동생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는 장로가 되었다. 이후 동생에게 넘어갔던 장자권이 회복되고 부모님과 형제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됐다.

Q. 가족 전도, 쉽지 않은데... 대단하시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내의 역할이 컸다. 공항에 보면 관제사가 있지 않나. 내 인생의 관제사가 바로 아내다. 가족으로부터 핍박받을 때에도 불평과 원망 하나 없이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며 가족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매일 밤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다. 아내 기도와 헌신 덕분에 모든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동생이 교회를 다니고 4년 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 소원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법을 따라다오. 내가 죽거든 너희 법을 따라도 좋다” 아버지 말에 순종하며 지극 정성으로 집안의 제사를 지냈다. 일 년에 13번의 제사를 드리는 우리의 노력에 아버지의 생각도 점차 바뀌어갔다. 3년 뒤 아버지께서 “내가 성경을 읽어보니 지킬 건 다 지키더라. 제사 드리기 전에 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제사를 드리자. 성경에 우상 에게 절하지 말라고 되어 있으니 너희는 제사 지낼 때 무릎만 꿇고 있어라.”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아버지는 “어차피 나 죽으면 너희 방식대로 할테니 이제부턴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셨고 86세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신앙을 가진지 20여 년이 지나고서야 이뤄진 일이다.. 가족뿐 아니라 친척 대부분이 믿음의 가정이 되었고, 명절이 되면 여기저기서 찬송이 울려퍼진다. 찬양을 들을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승리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류호승 장로(부천제일교회)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류호승 장로(부천제일교회) 

ㅣ사역의 시선

천 명이 넘는 종친회의 회장으로,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
자비량, 자부담으로 해외 선교에 집중
필리핀을 비롯한 미얀마, 중국 등에 교회 세워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채워주시는 하나님

Q. 지금 맡고 있는 일과 사역을 소개한다면?

문화 류씨 안산·군산 종친회 회장으로 문중을 섬기고 있으며, 필리핀을 비롯해 중국, 미얀마 등 선교지를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세웠고 3년 전 장로 은퇴 후에는 더욱 해외 선교에 힘쓰고 있다.

Q. 종친회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나?

그저 기적이라 말하고 싶다. 천 명이 넘는 종친회원이 모인 자리에서 회장 후보로 올라가서 당당히 말했다. “내 직업은 농부이자 교회 장로입니다!"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참석자의 87% 표를 얻어 회장에 당선된 것이 아닌가. 대법관, 국회의원 등 내노라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소위 말해 이단의 소굴로 나를 집어넣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우셨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천 명이 넘는 회원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그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자로 나를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종친회에 재산권 문제로 83개의 소송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나를 믿고 소 취하를 해준다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공표를 하겠다”. 이후 모든 소송 건이 취하되었고, 지금까지 단 한 건의 문제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

문화 류씨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며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류호승 장로
문화 류씨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며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류호승 장로

Q. 해외 선교에 집중한다고 들었는데?

권사 시절, 둘째 딸 때문에 해외 선교를 시작하게 됐다.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떠난 딸이 낙후된 선교지의 환경을 보고 나에게 “그곳에 교회를 세워주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을 해왔다. 그래서 원시림 같은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것이 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현재 필리핀 비안감리교회를 비롯해 교회와 유치원을 곳곳에 세우고 있다. 1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고 코피노 사역을 위한 센터도 설립했다. 필리핀 뿐 아니라 중국, 미얀마, 태국, 베트남, 일본 등의 선교지를 도우며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Q. 선교 단체를 세운 것인가?

개인적으로 하는 거다. 자비량, 자부담이다. 내 힘으로 하려고 했다면 결단코 할 수 없었을 일이지만, 하나님이 적재적소에 사람과 자원, 물질을 보내주셔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우리 교회 예배 시간에 선교에 대한 간증을 한 적이 있었는데, 84세이신 한 권사님이 나를 찾아와 보탬이 되고 싶다며 봉투를 건네고 가셨다. 폐지를 주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분이었는데 그 봉투 안에 100만 원이 들어있었다. 또 다른 분은 장애를 가진 성도였는데 필리핀 교회 증축을 위해 써달라며 200만 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선교의 곳간을 채워주신다.

Q. 선교 사역과 활동이 궁금하다.

도와만 주는 선교에서 벗어나 그들 스스로 개척하고 세워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년 2명의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아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배움의 장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외에도 길.찾.사(길을 찾아주는 사람들)선교회와 중국 개척교회와 북한선교를 위한 열두선교회를 섬기고 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땅끝, 바닷속, 산꼭대기 어디든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마음을 따라 선교지로 향한다.

ㅣ생각의 시선

선교 생각 뿐 … 선교지에 학교를 세우는 것이 소망
사람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길
교회 직분자, 하나님 두려워하며 이름 드러내지 말아야

Q.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선교다..(웃음) 최근 선교지에 유치원을 세우게 됐는데 초대 책임자를 맡게 됐다. 또한 해외 선교의 첫 문을 연 비안감리교회가 오지에 있는데, 그곳 아이들의 교육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반드시 학교가 세워져야 한다. 내 소망 중에 하나다. 학교 설립의 초석을 다져 선교의 기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하루 빨리 필리핀으로 가야 한다. 최근 이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것 같다.

Q. 결정과 선택의 기로에서 기준으로 삼는 가치관이 있다면?

여지껏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던 것 같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부어주시는 영감이 있다.

Q.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면?

골로새서 3장 17절이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교회 직분과 직무를 감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내 이름을 드러내고 내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 돌리면 된다.

Q. 기억에 남는 한 마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13년 전 장로 임직을 받을 때 일이다. ‘내가 장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홀로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내가 “사람이 뽑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거니까 순종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면 된다”고 말하며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시무 장로 때는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알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장로가 되고, 은퇴 후에는 성도들이 찾아오는 원로가 될 수 있도록 덕을 쌓고, 사랑을 베푸는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 한 마디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니 세 가지 일이 생각이 났다. 첫째, 꿈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날 바로 교회를 간 것. 둘째,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온갖 핍박을 받는 가운데에도 가정과 집안을 지켜낸  것이다. 셋째, 영혼 구원의 개척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Q. 장로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희노애락을 함께한 아내도 나의 진짜 모습을 모른다. 나조차도 내 모습을 모를 때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리고 나의 죽음, 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다. 이 땅에서 호흡이 다 할 때까지 진실된 행함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다 천국 문에 들어가고 싶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을 나와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축복을 누리며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류호승 장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을 나와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축복을 누리며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류호승 장로

ㅣ세상의 시선

교회와 성도가 먼저 변화해야
본이 되는 삶, 예수님처럼 사는 인생
행함이 있는 믿음만 있다면, 세상은 변화할 것

Q.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참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변화되길 기다리고 바라기보다 우리가 먼저, 나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전도하거나 선교할 때 말뿐인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우리 삶으로 우리의 행함으로 보여줘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난 후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두 가지 기도제목이 있다. 첫째는 ‘믿음의 본이 되게 해주세요’, 둘째는 ‘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해주세요’다.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은 변화하리라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여호수아서에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고급스럽게 포장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품어주시고 기뻐 받으시는 분이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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