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19세기 초에 유럽을 호령 하던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에게 인생에서 가장 무섭다고 여긴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을 때, 나폴레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궁중 이발사를 불러 수염을 깎을 때가 가장 무섭습니다.” 수염을 깎기 위해 의자에 기대어 이발사의 칼날 앞에 자기 목을 드러내 보일 때, 그 이발사가 혹여 적의 스파이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 때 마다 늘 목숨을 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좋고 나쁜 사람인지 알 수 가 없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늘 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늘 근심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면 어떻게 저들을 먹여야 할지를 근심했고, 배 위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에도 배가 뒤집혀 죽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샬롬’(평안)을 주겠노라’. 먹을 것이 없어도 근심하지 않고, 폭풍우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샬롬의 평안을 이제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샬롬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인 평화에 불과합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칼로 이룬 팍스로마나와 같이, 일시적인 껍데기에 불과해서, 오히려 더 근심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샬롬은 진정한 의미의 평안이기 때문에, 환경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 중에도 더 기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되고,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영원한 내면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샬롬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 샬롬의 평안을 주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국의 윌리엄 쿠싱(W.O.Cushing)이라는 목사님이 성대에 이상이 생겨 도저히 설교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강단을 떠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근심하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찬송시와 성가를 쓸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허락해 주셨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고백들을 써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419장인 것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여러분! 사실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경제, 정치같은 외적인 환경이나, 건강의 문제나, 오랜 시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내면의 문제, 바로 영혼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한 그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샬롬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그렇게 기도할 때에 비로소,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이 놀라운 샬롬의 능력, 영원한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평안을 소유한 사람이야 말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고, 그 천국 안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적인 근심과 두려움에 억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샬롬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글 ㅣ 신용수 목사(비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