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시절 

어거스틴은 북 아프리카의 조그마한 촌락 타가스데에서 354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제국의 하급관료로서 처음에는 이방인이었으나 주후 371년에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로마 귀족의 딸로서 기독교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경건한 여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주일학교 학생이 되어서 입교문답을 받았으나 여전히 형식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카르타고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였다. 

학창시절 사춘기를 지나면서 육체의 욕망에 눈을 떴다. 17세쯤 되었을 때 집안 형편상 일 년 동안 학교를 쉬게 되었다. 이때 그는 방탕아들과 어울려 청소년시절을 쾌락으로 보냈다.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세속적인 쾌락의 삶은 계속되었다. 그는 낮은 계급의 여성과 동거생활에 들어가서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2) 진리를 향한 여정 

19세의 나이에 키케로(Cicero)의 작품 『호르텐시우스』란 책을 읽고서 진리를 향한 정열을 가지고 처음 노크한 것은 성경이었다. 성경은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께로부터 무수히 들어온 신앙의 지침서였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교만한자의 눈에는 절대로 진리로 보이지 않았다. 수사학에 관심이 있는 그에게, 성경의 문체는 매우 조잡하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예지를 향한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지성인 어거스틴에게 성경의 기적의 말씀들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처럼 보였다. 

(3) 마니교의 입교 

그다음 문을 두드린 것은 마니교(Manechaeism)였다. 그들은 지금의 천문대에서 하는 것과 유사하게 별들을 관찰하였다. 그들은 일식이나 월식의 정확한 시차를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과학적인 태도에 어거스틴의 마음은 기울어졌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로부터 매력을 느꼈던 것은 이원론적인 마니교의 세계관이었다. 어거스틴은 늘 수수께끼로 놓여있는 자신의 문제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싶고 선하게 살고 싶은데 다른 한편에서는 육체의 쾌락을 제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내부 속에서 끓고 있는 선과 악의 투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그의 최대의 관심이었다. 

이 문제가 마니교에 들어와서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두 세력은 각각 선한 신과 악한 신에게 속해 있으므로 처음부터 인간의 마음을 비롯하여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선과 악 중 선을 택하면 선한 신이 이기고 악을 택하면 악한 신이 이긴다. 어거스틴 자신의 경우에 있어서 언제나 악이 선을 누르고 있었다. 마니교의 전도자들은 어거스틴에게 말했다. “당신이 더 명상하고 금식하고 수도하면 선이 악을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는 10년 간을 마니교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교주를 만나면 해결할 길이 있을까하는 한 가닥의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마니교에서도 진리를 찾지 못한 그는 미련 없이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4) 신플라톤주의자가 됨 

밀란에서 수사학 교수를 하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이제 철학에서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신플라톤주의는 종교적 색체들을 통하여 모든 존재들의 근원 즉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The Ineffable One)에게 도달코자 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목표는 인간들의 이러한 명상 속에 사로잡힐 때에 경험하게 되는 무아경지의 황홀경이었다. 마니교의 이원론과는 달리 신플라톤주의는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의 원칙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궁극적 존재에 보다 가까운 실재들은 우수한 것이며 멀리 떨어질수록 열등한 것이다. 악이란 것도 사실 다른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존재로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악의 근원에 대한 어거스틴의 물음에 대답하는 듯 싶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 속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플라톤 철학에서는 길이 없었다. 궁극적 존재, 즉 하나님을 말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께 가는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설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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