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세중기: 안정과 성장의 시대 

중세중기는 초기의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를 지나서 안정을 되찾고 성장하게 된다. 교황청은 세속 영주들의 싸움을 완화시키는 중재 역할을 하면서 그 영적인 권위가 계속 성장하여 갔다. 동방지역은 모슬렘의 약화로 인하여 서방제국의 세력이 강화된다. 잉여산물과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고 인구도 증가된다. 안정과 성장의 시대를 맞이하여 세속권력의 권위도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양대 세력 즉 교회와 세속의 권력들의 팽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세역사의 전환점을 가져올 현상을 야기시켰다. 그 한 가지는 팽창의 결과가 십자군 전쟁으로 나타났다.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성지탈환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반2세의 주창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진행과 결과는 중세사회가 근세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될 만큼의 엄청난 전환점을 이루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사회구조의 틀이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토지에 근거한 농촌경제와 힘을 주종한 군사문화의 합작품인 봉건제 사회체제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동·서 교역이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하므로 신흥 시민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중해 연안에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고 상공업의 발달은 길드를 형성하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현하였다. 전문분야 의 출현은 정치가와 종교가를 분명히 구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팽창의 또 다른 결과는 스콜라 신학의 등장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동·서 문물을 교류시키면서 동방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시도하는 철학과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세의 대학교가 등장하게 되므로 르네상스를 향한 준비들이 서서히 진행하게 되었다. 성상유물 숭배는 공적인 신앙의식에서는 사라지게 되었으나 개인의 삶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4. 중세후기: 혼란과 전환의 시대 

십자군 전쟁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므로 다시 불안정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14세기에 들어와서는 전통적인 봉건제 사회는 존재할 수 없었다. 상업혁명과 더불어 지리상의 발견, 시민계층의 형성, 길드의 형성, 대학의 출현, 도시의 발달 등은 중세체제를 무너뜨리는 전위부대들이 되었다. 

토지는 더 이상 부와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소위 '은대지제도'라고 하는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중상계층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과거 영주들에게 자신들이 농노로서의 의무를 현금으로 한꺼번에 지불하고 자유민이 된 중상계층들은 각국의 왕들과 결탁하여서 절대 왕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내걸면서 신흥 중상계층의 경제적 협력과 지지를 얻는 각국의 왕들은 로마교황으로 부터의 독립이 시도되었다. 자연스러운 변화는 대토지 귀족들인 영주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별히 14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도시들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인구 오만 명 이상의 도시가 많아지게 되었다. 도시의 발달은 빈부격차와 부수적인 사회문제들을 수반하면서 계층구조의 안정에 대한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도시는 새로운 변화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도시인들의 생각은 매우 급진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들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정치적 질문이 제기되었다.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보편적인 사회체제에서의 유일한 지도자가 정말 필요한가의 질문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가 꼭 교황이어야만 하는가? 교황은 신앙의 지도자로서 그 지도영역이 교회에만 머물러야 하지 않겠는가의 의문이었다. 

5. 교황권위의 하락과 개혁운동의 시작 

중세말기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교황권의 도전이었다. 교황의 권위가 급속하게 추락되는 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힐데브란트 교황이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시켰던 일이었다. 이 파문장 사건은 외관상 교회의 권위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절정을 이루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는 교황의 권위를 땅끝까지 하락시키게 되었다. 뒤이어 교황청이 불란서 군대에 의하여 아비뇽 지방으로 끌려가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자존심이 강한 이태리사람들은 로마를 떠난 교황은 교황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황을 옹립하였다. 결국은 중세사회의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교황은 분열의 상처와 상대방을 향한 파문장의 남용 등으로 교회의 권위를 땅 아래로 까지 끌어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면죄부의 판매 등은 이제 중세사회의 마지막을 기다리게 하였다. 중세교회의 개혁운동은 신비주의 신앙공동체들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하였다. 그들 신앙공동체에서는 교육과 명상, 노동을 강조하는 청빈한 수도사들이 삶의 실천을 통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특별히 교육에 힘쓴 결과 잊혀진 고전어 공부를 장려하면서 성경을 되찾게 되었다. 성경연구는 의식 있는 수도사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운 중세교회의 허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의 타락은 사제주의 중심의 신앙에 회의와 갈등을 일으켰다. 신부에게 고해성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신비주의 운동이 만인제사장등 을 비롯한 종교개혁 운동의 사상적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속의 권력과 교권이 조화를 이루는 한도 내에서는 여전히 중세 사회 체제는 존속할 수 있었다. 그 균형이 깨지게 되면서 근세를 향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요구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청과 더불어 말씀으로 돌아가는 교회의 개혁운동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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