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방교회에서 기독론 논쟁이 일어났던 이유와 단성론 분파교회들 

희랍, 에베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의 교회들은 희랍문화의 영향권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인하여 동방교회의 신학적 관심은 철학적인 요소가 짙었다. 특별히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심의 진리를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안디옥파와 알렉산드리아파로 나누어져 논쟁이 된 기독론논쟁은 451년 칼케돈 신조로 마무리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 신인양성은 혼동이나 변화나 분리나 분열함이 없이 연합되어 있다”라는 칼케돈 신조가 정통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동방의 유스티니안 황제는 칼케돈 신조의 신봉자로서 강력하게 정통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애굽, 시리아교회 등은 유티케스와 키릴의 입장을 계승하여 단성론적인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는 단성론 교회들이 분파를 형성하였다. 아르메니아교회, 시리아교회, 콥틱교회 등이 대표적인 단 성론파 교회들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엄격한 고행주의를 신앙의 철칙으로 삼았다. 독신성직자제도를 고집하고 금식 등을 장려하였다. 고행주의 신앙을 생활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교회력에 성스러운 절기를 많이 만들어서 지켰다. 그 이유는 기독론을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신성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방의 교회들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단성론파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단성론파는 아니다하더라도 그러한 분위기의 신앙의식이 크게 작용했음에는 부인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동방의 교회들이 단일의지론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당 숫자의 동방교회 성도들이 생각했던 '단일의지론'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기독론에 있어서의 칼케돈 신조를 신봉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인양성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나타난 의지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만이 나타났다고 믿는 교리이다. 

그들이 '단일의지론'을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성경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점도 티도 발견하기 힘든 거룩한 생애를 사셨기 때문이었다. 즉 복음서에 나타난 기독론을 지나치게 윤리적으로만 적용시키어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였다. 성경을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의지를 상당부분 찾아볼 수 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수난을 앞에 두고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적나라한 인성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인자이심을 나타내시면서 인간미가 넘치는 접근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주셨다. 동방교회의 '단일의지론'은 이슬람의 침입으로 약화되었다.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돈 신조를 재확인하여 그리스도의 '양의론'을 채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의의지와 더불어 인간의 의지도 함께 공유하셨다는 정통교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던 것이다.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Middle Ages)

2. 네스토리우스 교회 

424년 동·서방을 망라하여서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독립교회를 선언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다. 처음부터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합법적인 신앙생활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때문에 동방제국 안에서 이 신앙을 따르던 교도들이 페르시아 왕이 통치하던 지역으로 옮겨가서 독립된 조직체를 구성하였다. 그들 공동체의 선교의 열정만은 대단하여서 멀리 인도와 당나라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니케아 신조에 표현된 대로 삼위일체를 신앙하였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안타깝게도 칼케돈 종교회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역시 기독론이었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은 양자론 (adoptionism)으로 흘러갈 경향성을 띠우고 있었다. 

육적인 인간 예수님의 인격(Personality)을 삼위일체의 제2격의 인격을 표현하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방교회의 단성론분파와 다른 점은 고행주의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직자들은 대부분 결혼하였으며 독신사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동방의 교회(the Church of the East)라고 불렀다. (William Ragsdale Cannon)

3. 동방교회의 결속과 강화 

야만족의 침입에 뒤이어 이슬람의 침략으로 제국의 영토는 축소되었다. 제국 영토의 축소는 교회의 쇠약을 의미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새로운 정복자들은 교회에 대한 면세특권을 박탈하였다. 많은 재산을 지닌 교회에 대한 세금수입으로 새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재산을 빼앗긴 교회는 남아있는 재산들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단결하여야 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감독을 중심으로 단결되기 시작하였다. 단합된 동방교회는 교회의 강화를 시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기강확립에 힘쓰게 되었다. 성직자들의 소명과 그 책임의 준엄함이 강화되었다. 유흥가와 도박장 등의 출입을 전면금지 하였다. 

여성들은 전혀 사회적 접촉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성직의 세습은 허용하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아니고 성찬예배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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