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기적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 경남으로
누군가 해야한다면 내가해서 하나님께 드리자

고향 경기도 용인에서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 경남 마산으로 와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고 있는 이종승 목사. 하나님의 사역 앞에서 "언젠가 할거라면 지금 하자",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하자"라는 열정으로 지역, 교단, 연합회, 총회의 큰일들을 풀어나간 이종승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가 CTS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가 CTS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ㅣ삶의 시선

Q. 당신의 삶을 어떤 드라마 장르인가요?

기적이다. 내가 나 된 것이 기적이고 주님 만나고 오늘까지 살아온 것도 기적이고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도 기적이다. 나는 진짜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그냥 항상 지역이나 교단이나 교회에서 굵직한 큰 사건, 막히고 얽힌 사건에 막힌 것 뚫게 하시고 얽힌 것 풀리게 하시고 안되는 것 되게 하시면서 총회, 한국 교계, 지역에서 쓰신 것을 보면 기적이다. 기적!

Q. 삶의 굴곡 중에 가장 행복했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떤 순간이었는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세우면서 가장 행복했고 힘들었다. 기념관을 세우기 전, 과거 경남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던 호주 선교사님들의 후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경남의 교계 대표들이 호주에 방문했었다. 그때 80대 후반의 호주 선교사님 후손의 가정에 방문했을 때 놀랍게도 100년 전 경남 복음의 역사가 모여있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거창지역과 1930년대 진주지역 등 복음을 전하시던 호주 선교사님들의 모습과 2천 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때 호주 선교사님 후손이 역사적 자료들을 버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기념관을 만들어 경남 복음의 역사적 자료들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호주의 선교사님들이 대한민국에서 추방되면서 대부분의 자료가 불태워지고 없어졌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경남 복음의 역사적 자료들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기념관을 세우게 된다면 지금 세대와 다음 세대가 과거 조상들의 신앙을 배워 새로운 복음의 역사가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호주 선교사님 후손들의 설득을 얻어 2천 장의 사진들과 선교사님들이 사용하셨던 안경과 타자기, 성경책 심지어 수저, 만년필 등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경남과 호주를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창원공원묘원에 조성된 호주 선교사 묘원과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창원공원묘원에 조성된 호주 선교사 묘원과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하지만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세우는 과정이 순조롭진 못했다. 기념관을 세우던 중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질타, 오해 등을 받으며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 나는 강단에 나와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경남 사람도 아닌 데 왜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셨습니까? 너무 힘듭니다.”고 하소연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아무도 행하지 않아, 내가 너를 사용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통해 들렸다. 하나님께 너무 죄송해 눈물을 흘리며 회계하고 다시 한번 더 힘을 얻게 됐다.

이후 창원인터내셔널 호텔에서 교계 목사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교계 목사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목사님이 도움을 주겠다고 지지해주셨고 반대하던 목소리와 질타가 없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됐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지금의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됐다. 내 인생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경남선교 130주년 기념 애배에 참석한 호주선교사 후손들이 묘원을 돌아보고 있다.
경남선교 130주년 기념 애배에 참석한 호주선교사 후손들이 묘원을 돌아보고 있다.

Q. 하나님의 첫사랑을 경험한 순간은?

신앙생활은 교회학교 때 하다가 유교 가정이라 아버지가 교회에 가면 제사 못 지낸다고 교회에 못 가게 했다. 그래서 교회에 못 가다가 청년 때 다시 교회를 나갔다. 나는 적극적이고 성실해서 나간 날부터 주일 낮, 저녁 예배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교회 화장실 청소에도 나갔다. 목사님이 삽 들고나오라면 나가고 오라는 곳은 모두 갔다. 청년회 총무, 회장을 맡았고 내가 없으면 교회가 쓰러질 정도로 열심히 했다. 

나는 사업으로 일찍 성공해서 26살에 결혼을 하고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했다. 당시 남자들 월급 3 ~ 4만 원 받을 때 십일조만 40만 원을 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의 축복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예수를 뜨겁게 만난 것은 9년 후다. 나는 폐병 2기 판정을 받고 급성 늑막염으로 비형간염까지 합병증이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을 찾아가 20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간을 씻어내고 영양제 맞고 알약을 12알씩 먹었다. 약을 먹으면서 늑막염을 줄인다고 주사를 2대씩 맞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엉덩이에 주사를 놓으면 주삿바늘이 꺾이고 안 들어갔다. 몸무게는 52킬로까지 빠졌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가 주님을 뜨겁게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계속 목사님이 나에게 신학교를 가라고 했다. 나는 사업이 잘되고 있었고, 결혼을 일찍 해 애들도 여럿이고 연로하신 부모님 모시고 있어 신학교를 갈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 못 만나면 아주 결판을 내야겠다 생각하고 부모님께 큰절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목숨 걸고 매달려서 주님을 만났다. 얼마나 뜨겁게 만났던지 회개만 4시간을 했다.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를 하고 성령을 받고 병을 고치고 내려왔다. 나중에 종합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보니 "폐병을 크게 앓으셨네요. 늑막염, 간염도 앓으셨네" 라고 하셔서 이제는 어떠냐고 물으니 깨끗이 나았다고 했다. 그때 고침 받아서 40년 동안 건강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

Q. 가정에서 나의 모습은?

사람은 두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한다. 목회에 최선을 다하면서 가정적이기는 힘든 것 같다.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가정적인 분들이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목회에 최선을 다해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목회다. 가정과 아내, 자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두 가지다 잘할 수 없다. 목회도 제대로 못하니까 하나님께 죄송하다.

ㅣ사역의 시선

Q. 지금 맡고있는 일/사역을 소개한다면?

지금은 많이 내려놨다. 한때는 지역 교계 노회 총회까지 내가 맡은 직분이 26개까지 됐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큰 사역은 우리 임마누엘교회 담임목사 사역이다. 그리고 한국성시화 대표회장을 맡고 있고. 부산 백석신학교 학교 학장으로 3년째 있다. 그리고 경남지역의 교계 신문인 ‘크리스찬 경남’ 이사장을 맡고 있다.

Q. 어떻게 경남에서 사역하게 되셨는지?

나도 생각 못 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이 교향이다. 신학을 늦게 갔는데 기도 안 하면 그때는 죽는 줄 알았다. 새벽 철야는 당연한 것이고, 신학교 동기들이 매일 저녁만 되면 서울 근교 기도원에서 산기도를 했다. 대학 4년, 대학원 2년 총 6년 동안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기도했다.  어느 날 기도를 한 3시간 정도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복음이 가장 필요한 자리에 보내주옵소서”, “내가 거기서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4년 반 동안 시키셨다. 졸업 후 개척을 위해 20일 금식을 하고 내려와서 개척지를 찾아 안산, 성남, 이천, 구파발, 대치동 등 다녀보았지만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안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서울에서만 찾고 있다고 책망을 하셔서 그 후로 3일 동안 물도 안 먹고 단식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4년 반 동안 “복음이 제일 필요한 자리에 가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가 기억났다. 그러던 중 동기 1명이 전화가 와서 아직도 개척 안 했냐고 묻더니 “그럼 마산을 가봐라 복음화율이 4%밖에 안 되는 곳인데 너무 교회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마산에 내려왔다. 내려와 이틀을 있으면서 마산에 유명한 십자바위(주기철 목사 기도처소)와 무학산 기도원으로 갔다. 올라가면서 보니 절간들은 대궐 같은데 무학산 기도원은 다 쓰려져가고 작고 초라했다. 얼마나 속상하던지 바울이 아덴에 갔다가 우상들 때문에 속상했던 것처럼 속에서 화가 났다. 그 길로 갈멜산기도원에 가서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뜻을 구했더니 “네가 갈 곳이 거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마산으로 내려왔다. 그때가 1986년 12월이다. 내려와서 개척 준비하다가 87년에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해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창원 임마누엘교회 전경
창원 임마누엘교회 전경
창원 임마누엘교회 예배 현장
창원 임마누엘교회 예배 현장

Q. 일/사역 가운데 감동,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역사를 좋아한다.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배울 때 호주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나라 교회사는 언더우드 목사님과 장로교 중심으로 쓰여 호주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는 2페이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경남이 복음화가 안 된 이유가 호주 선교사님들이 이곳에서 사역을 잘 못했다고 혼자 생각했다. 사실상 호주 선교사님들이 하신 일이 가치가 없다고 봤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 때 한국어를 말살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조할 때 장로회 노회 23개 중에 영남 노회만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우리가 지금도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 경남 분이시다. 이런 사실이 참 연결이 안 됐다. 그런데 우연히 경남신문에 기사 하나가 났다. 기독학교인 의신여중을 세웠다가 돌아가신 메큅선교사님이 이은성 선생 가족묘에 묻혔는데, 가족이 다 미국으로 이사를 가서 그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고 묘를 파가라고 아니면 '무연무묘'롤 하겠다고 공고를 낸 것이었다. “그분 묘까지 못 모신다면 어떻게 하냐” 그렇게 생각해서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서 묘를 해드리자 결의를 하고  창원공원묘원에 물으니 1평이 300만 원이었다. 그래서 나도 1평 헌금하고 다른 분들도 동참해서 10평 값을 모아 창신대학교 이사장님은 위원장이 되시고 나는 모든 행사를 준비하는 행사 위원장이 되어 창원공원묘원에 옮기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엉뚱하게 일을 확장시켜주셨다. 경남에서 돌아가신 호주선교사 8분의 묘를 공원묘지에 모실 수 있는 길을 열린 것이다. 창원공원묘원 이사장 되는 안수집사님께서 무상으로 1000평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서 묘원을 잘 만들게 되었다. 

호주 선교사 후손들의 기증품으로 조성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실내
호주 선교사 후손들의 기증품으로 조성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실내

그런데 호주에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는데 한 번도 감사를 하지 않았다. 더욱이 호주 선교사 파송 120년 되는 해라 호주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 교단에 연락을 해서 선물을 준비해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기 위서 호주를 찾았다. 선교사님들은 다 돌아가셔서 후손 가정을 찾아갔더니 그곳에 거창교회 역사, 진주교회 역사, 경남 선교의 역사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기념관을 만들기로 하고 왕복 비행기 표를 드려 126명의 후손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후손들에게 유품들 책, 타자기, 성경 등 그분들의 흔적을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드렸다. 후손분들이 천여 점의 기념품을 가지고 오셔서 선교사 묘원 옆에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이 설립됐다. 우리의 역사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최초로 경남 땅에 발을 디딘 날을 기점으로 10월 첫째 주일을 ‘경남 선교의날’로 만들고 경남의 교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손양원 목사님 생가도 복원하게 되고 주기철 목사님 기념관도 설립해서 경남 신앙의 역사를 찾게 되어 자랑스럽다.

2019 경남 선교의날 감사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종승 목사
2019 경남 선교의날 감사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종승 목사

Q. 일에서 지쳤을 때 에너지 충전요법은?

목사가 등산이나 낚시는 할 수 없다. 바빠서 시간을 내기도 힘들다. 나는 특별한 충전을 한다. 자동차의 여러 부품 중에 ‘세로 모터’라는 부품이 있다. 자동차 엔진 시동을 걸면 시동을 걸어주고 운행이 될 때는 자체적으로 배터리도 충전해 주며, 자동차의 모든 전자 기능을 움직이게 한다. 나는 그 자동차 세로 모터 같다. 충전은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하면서 금요일 철야 기도 시간에 충전을 한다. 성도들과 밤을 새우며 철야 기도를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영적으로 힘들었던 것도 없어지고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그렇게 달려간다.

Q. 당신의 달란트를 소개한다면?

주님 사랑하는 열정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가운데 나의 기준이 있다. 교회 일, 연합회 일, 총회 일도 모두 하나님의 일로 본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어떤 분은 교회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노회나 연합회나 총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노회나 연합회, 총회에서 결정하고 모든 것을 끌고 나간다. 교회 일도, 연합회 일도, 노회 일도 모두 하나님 일로 보고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백석교단의 부 총회장을 하면서 전체적인 개혁을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부총회장 4년, 총회장 1년을 하면서 대신교단과 통합을 했다. 그때 한국교계가 한기총과 한교연으로 분리되어 명분 싸움을 하느라 한국교회의 현안 문제, 종교편향 문제, 종교인 과세 문제, 동성애 차별법 등 큰 문제들을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합하기 위해 한국교회통합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회장으로 3년을 뛰었고 한국교회총연합회가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것을 언젠가 할 거라면 지금 하자”,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드리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일도 많고 항상 바쁘게 살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회 제1회 총회 현장
한국교회총연합회 제1회 총회 현장
악법 재정을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
악법 재정을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

ㅣ생각의 시선

Q. 어떠한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때 가장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기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원하시면 한다. 상황이 어떠하든 많은 사람이 반대하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결정한다. 

Q. 나에 대해 책을 쓴다면 머릿말에 남길말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다”라고 쓰고 싶다. 참 부족한 사람인 나를 구원하신 것도 감사한데 기름 부어 써주신 것도 감사하다. 돌아보면 경남에 내려와서 백석 경남노회도 처음 만들었다. 그 후 부산, 울산, 경남에 백석 교단 교회가 550개가 있다. 지역 신학교도 교단에 최초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600여 명의 주의 종을 길러냈다. 

교회에서는 재정의 60%를 선교에 쓰기로 결정했고 8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마음은 50개인데 잘 안됐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을 하면서 법인화를 하고 경남에서 인정받는 단체가 되었다. 그전에는 친목모임에 불과했던 단체가 전국에서 가장 연합이 잘되는 단체가 되었다. 경남이 모범이다. 

Q. 독자에게 권면과 도전의 한마디?

한국교회에 한마디 하고 싶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성전 중심으로 사도행전 같은 말씀과 기도로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세월이 급변해도 한국교회는 다시 부흥한다. 다시 살아난다.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방법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
이종승 목사(창원 임마누엘교회)

ㅣ세상의 시선

Q.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걱정이 많이 앞선다. 너무나 급속도로 한국교회와 사회가 빠르게 변질되고 있다. 아니 변질을  넘어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 가정도 학교도 군대도 법도 윤리도 교회도 무너지고 있다. 기성세대로서 마음이 아프다. 이것을 속수무책으로 내버려 둘 수 없고 어떻게든 교회를 살려야 하고 우리 자녀들도 지켜야 한다.

Q. 변화했으면 하는 세상의 방향은?

성경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면 된다. 야곱이 벧엘에서 빈들에 있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곳에 단을 쌓고 돌아오면 하나님 성전을 짓고 십일조하고 살겠다 약속한다. 하지만 20년 만에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데 야곱은 수꼿에 머문다. 그러니 외동딸 디나가 세겜 족장에게 겁간을 당하고 다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장 가족을 몰살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다. 우상 같은 드라빔을 벗고, 옛날의 더러운 옷들도 벗고 벧엘로 올라가니 세겜 사람들이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고 벧엘에서 기도하니 다시 야곱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된다. 다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면 어렵고 힘든 것이 해결된다. 사람의 방법으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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