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장 37절)

1774년, 독일의 문학가인 요한 볼프강 괴테가 쓴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제목이 ‘슬픔’이란 단어로 끝나듯이, 소설의 마지막은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납니다. 괴테는 자신의 연애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흉내 내는데, 이 소설의 베르테르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가득이나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왜 그런 슬픈 얘기를 하세요? 좀 유쾌하고 재밌는 얘기 없으세요?”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이 트로트 가요라는 말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가만 돌아보니, 우리도 이 슬픈 베르테르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당장은 죽지 않아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배우자도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아시는 대로, 마귀의 치명적인 전략 중 하나는 바로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없어 보이는데, 사실은 죽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였습니다. 하루종일 깨어있으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깨어있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자녀를 위한 한 주간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새벽을 깨우고, 기도를 나누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녀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른 책망으로 저를 끌고 가셨습니다. 이번 기도회를 하기 전에는 “자녀들을 위해 운 적이 있느냐?”로 책망하시더니, 이번 한 주간 동안은 “지금 졸고 있는 성도들을 보고 있느냐?”였습니다.
그리고 장로님들로 시작하여 구역장님들과 속장님들, 부장님들과 선교회장님들, 교사들과 찬양대원들, 제가 알고 있는 교우들과 청년들까지, 졸고 있는 심지어 자고 있는 분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저를 책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저를 여러분의 파수꾼과 목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 파수꾼은 맹인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이며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이며 몰지각한 목자라”(사58:10-11)
정신이 번쩍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심 “주님, 이 어려운 때에 이만큼 하고들 있쟎아요? 왜 혼을 내세요?”하고 싶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부인도 우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교회와 우리교우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님께서 저에게 누구를 보여주셨는지가 궁금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듣고 회개하여 다시 일어서실 수만 있다면, 여러분과 불편한 관계가 되어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습은 여러분이 가장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때로 성령님의 책망을 듣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번 주일도 못 만나지만, 부디 꼭 계신 곳에서 깨어있는 예배자와 중보자가 되어 주십시오.
글ㅣ장찬영 목사(강남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