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우리는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환경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무상한 환경 속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입니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합니다. 자족의 비결을 배웠으므로 그는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도 환경을 정복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환경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지금 옥중이라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본문 10절에 “크게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 형편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외적 환경과는 무관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은 다음 두가지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했기 때문. 우리는 좋은 예를 요셉의 일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세기 45장 5절,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렸는데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형들을 용서하고 부둥켜안고 울 수 있을까요? 요셉에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불평, 원망, 한탄 없이 환경에 적응하여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성실하게 사십시오. 부하더라도 죄짓지 말고 겸손하시고 가난하더라도 비굴하지 말고 곧고 바르게 사십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힘에 의존했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영적인 만족을 주었습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곧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내가 덧입고 사는 것, 곧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창조자시며 만물의 주관자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환경에 꼼짝 못 하는 주님인양 생각하고 사십니까? 풍랑을 만나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처럼 그 배 안에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잊고 사는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선 다윗처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사무엘상 17장 45절, 칼과 창과 단창과 같은 환경을 비록 맨주먹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담대히 극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능력이 자족의 근거임을 알고 체험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만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러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듯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워 환경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글ㅣ이재범 목사(대구 남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