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장로 사업가에서 주님 앞에 엎드린 목회자가 됐다
부도와 질병, 교회 개척 과정에서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며 교회에서 답을 찾는 이승웅 목사

아버지로 인해 온 가족이 주님을 영접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세우신 교회 밖에 모르는 성법교회 이승웅 목사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성법교회 이승웅 담임목사가 교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성법교회 이승웅 담임목사가 교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ㅣ삶의 시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온 가족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삶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범사가 '주님의 은혜'였다

Q. 목사님의 가정에 대한 소개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징병되어 가서 계시다가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질병으로 돌아가시게 됐다.

돌아가시기 전에 입원하셨던 병원에 의사분이 장로님이셨고 그분의 아버지가 목회자 셨다. 예장통합 교단 경북노회에서 유명하신 분이셨는데 그때 의사셨던 장로님께서 우리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1년 정도 계시다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우리 가족에게 ‘예수님 믿으라’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남은 가족 모두가 교회를 다니게 됐다.

나는 3남 1녀의 막내로 자랐다. 당시 대구제일교회에서 내가 살던 청도에 청도제일교회를 개척했는데 24인용 군용 텐트를 쳐놓고 예배를 드렸다. 이후 교회를 지을 때 청도에는 돌이 많아서 돌로 교회를 짓게 됐는데 당시 3, 4 정도밖에 안되던 나도 돌을 들어 옮기며 교회 짓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큰 형님은 대구제일교회에 이상근 목사님 계실 때 수석 부목사로 오랫동안 섬기셨고 1981년도에 미국에 가셔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며 교단 총회장도 지내셨다. 작은 형은 집사고 누님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교회에서 권사로 섬기다가 지금은 사위가 개척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자라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들 아버지 바람대로 신앙생활 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내와는 1984년도 11월에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함께 모여 찬양을 드리고 있는 이승웅 목사 가정
함께 모여 찬양을 드리고 있는 이승웅 목사 가정

Q.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순간들

나는 집안의 막내라 할머니의 품 안에서 오냐오냐 크다가 군대에 가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다. 군대 생활 가운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서 성경을 암송했던 구절들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고 말씀에 의지해 요셉처럼 그 시간을 보냈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제대 후에 사우디에 일하러 갔을 때도 좋은 직책을 맡게 됐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은혜는 사업을 하던 시절에 경험하게 됐다. 나는 36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어느 날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입원하게 됐다. 병원에 16일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3일째 되던 날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 그해에 성경 통독 계획을 세웠지만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성경통독을 하며 보내던 병원에서 3일째 되니까 몸이 불덩이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그 뜨거움을 성령을 불로 느끼고 감사히 받았다. 이후 질병이 깨끗히 떠나가는 경험을 했다.

IMF 다음 해인 1998년 9월에도 큰 은혜를 경험했다. 추석 이틀 전쯤에 억지로라도 공장이 돌아가도록 해놓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휘청하면서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리 돈 찾아서 직원들 급여를 나눠주고 직접 차를 몰고 병원 응급실 앞에서 쓰러져고 뇌경색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지 않고도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혈관 확장이 되어 전신마비를 면하고 반신마비만 겪게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우리 아내가 참 많이 고생했다.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내의 도움이 컸다. 이 자리를 빌려 평소에 아내에게 전하고 싶었던 큰 고마움의 표현을 아낌없이 하고싶다.

이승웅 목사와 신영희 사모
이승웅 목사와 신영희 사모

Q. 장로에서 목회자가 된 삶

1997년도 11월 23일에 장로 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직후인 12월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고 회사가 부도를 맞게 됐다.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후로도 달성제일교회 시무장로로서 11년을 섬겼다.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도 기도 순서 맡은 날은 빗길, 눈길을 헤치고 달려와 맡은 순서를 지켰는데 그때마다 목사님이 놀라셨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평신도였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다고 생각해 새벽기도도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여 특별한 일이 생겨 새벽기도를 가지 못한 날에는 꼭 늦게라도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사실 사업을 할 때는 늘 밖으로 다니다가 이후 교회에 묶이는 목회자가 되니 힘들긴 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맛있게 먹이기 위해 설교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참 좋다.

ㅣ사역의 시선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IMF 금융위기로 부도가 났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었다

Q.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게된 계기?

대구에 있는 업체들 대부분이 IMF 당시에 부도가 났다. 내 잘못이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나도 당시에는 가족과 함께 원룸으로 꽃겨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숙소에서 가족회를 했는데 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시간에 아내가 “당신의 길은 사업이 아니었던 것 같다.”라고 말해서 목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목회자의 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에 대한 마음도 있어서 사업하면서도 대구에 있는 동산성서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나는 사실 그 가족회의를 내 유언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40일 기도를 하게 됐고 기도를 마치고 당시 담임목사님을 찾아가서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더니 신학 공부를 허락해 주셨다. 사업할 때도 두 번 정도는 허락을 구했었는데 허락하지 않으셨던 목사님이셨기에 의아했다. 나중에 목사님께 여쭤보니 “예전에는 이 장로의 인간적 모습으로 신학을 하려고 했으니 하지 말라고 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IMF 이후에는 말 그대로 초죽음 상태가 되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IMF로 인한 부도 당시의 흔적
IMF로 인한 부도 당시의 흔적

Q. 사역의 과정 소개

신학을 시작하긴 했지만 뇌경색 후유증으로 기억력 상실이 온 상태였다. 뇌경색 이전에는 교회에서 집회를 하면 내가 찬양인도자를 할 정도로 찬양을 잘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찬송가 가사를 보지 않으면 찬송이 안된다. 그런 상황에서 신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히브리어 수업을 듣다가 너무 힘들어서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교무처를 찾아갔더니 힘들더라도 한 한기를 마쳐보자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젊은 학생들을 보니 사회 경험이 많은 내가 힘을 내서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경색 전 평신도 시절에는 찬양인도자로서의 사역도 감당했다.
뇌경색 전 평신도 시절에는 찬양인도자로서의 사역도 감당했다.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면서 개척교회를 바로 시작하게 됐다. 임대료 40만 원으로 개척교회를 하다가 한 장로님을 만나서 그 장로님 땅 245평에 건평 120평의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교회를 지은 땅이 교회 땅이 아니라 장로님 땅이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지은 교회를 헐어야 하는 말할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서 잠시 경북 예천에 있는 수월교회에 부임해 이었는데 이곳 성법교회에서 연락을 받게 됐다.

처음에는 예천에서의 삶이 좋아서 성법교회에 오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여러 가지 사역을 하면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마음도 같았기에 청빙 설교를 만류하던 아내에게 “성법교회는 역사도 깊고 배출한 목회자들도 많은 좋은 교회이기 때문에 나를 오라고 할 교회가 아니다.”라며 “포항에 가서 회도 먹고 설교나 신바람 나게 하고 오자”라고 아내를 설득해 교회를 처음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설교 직후에 성도들이 다 “우리교회에 오시라”라고 붙잡았다. 그래서 수월교회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주간 수요일에 "성법교회 장로님이 성법교회에서 오라고 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오랜 역사를 간직한 좋은 교회로 가시는 거라면 너무 좋은 일이라며 “얼른 가시라”라고 했다. 그래서 성법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대구서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승웅 목사(2014년 4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대구서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승웅 목사(2014년 4월 6일)

Q. 기억에 남는 사역 소개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목양실이 없었다. 화장실도 물이 다 얼어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위치도 자세히 보니 매우 산골이었다. 성도님들이 다 어르신들이라는 것도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건축자재 생산 회사를 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부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마다 고쳐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부임하고 2년 사이에 교회는 2분, 마을에서는 14분이 돌아가셨다. 이래서는 교회와 마을 모두가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마을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귀농 귀촌’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포항시청에 찾아갔더니 귀농 귀촌 담당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에 2년 동안 귀농 귀촌 사업이 있었지만 수요가 없어서 사업을 반납하게 됐다고 내가 그곳에 너무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담당 공무원에게 보고서를 잘 써서 예산 부족으로 사업을 못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다음에 사업이 되도록 해달라고 조언했다. 이후에 담당자가 새로 와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3년 만인 2020년 말에 예산 4천만 원이 책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귀농 귀촌의 집 건립을 시작하게 됐다.

시내에 사셨던 분들은 막상 시골에 오면 적응을 못한다. 밤 되면 깜깜하고 비슷한 또래도 없기 때문이다. 은퇴하신 분들은 은퇴자금은 많기 때문에 처음부터 땅도 많이 사고 전원주택도 잘 지어서 시골에 들어오지만 이곳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가게 되면 오히려 마을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게 되어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장님과 대화 끝에 외지인들이 마을에서 마련한 집에서 생활해 보고 정착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분들만 정착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마을을 복지센터로 만들 생각이다. 어른들은 마을을 떠나 요양병원을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을 복지센터를 통해 주간보호센터, 재가복지, 공동식사, 공동빨래, 기타 프로그램을 하도록 만들어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외지의 요양복지사나 간호사 등 젊은 분들이 유입되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목회는 농사짓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심어놓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메마르면 물을 줘야 하고 풀이 나면 뽑아 줘야하고 영양분이 부족하면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고 병이 들면 약을 줘야 하는 모든 것이 목회와 농사의 공통점이다.

예장통합 총회 지정 귀농귀촌 상담소(2019년 12월 19일 지정)를 운영중인 성법교회
예장통합 총회 지정 귀농귀촌 상담소(2019년 12월 19일 지정)를 운영중인 성법교회

ㅣ생각의 시선

참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나의 삶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성법교회' 밖에 없다
'성경과 예수님이 내 사역의 기준'

Q. 요즘 가장 많이하는 생각

마을의 할머니들에게 전도하러 가면 예전과 다른 점이 한가지 있다. 개인은 잘 살고 교회가 못 산다는 점이다. 교회만 못 살고 다 잘 산다.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도 힘드신 어른들이지만 자식들을 위해 밭에 일하러 가신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 돈이 많으심에도 쥐가 나오는 낡은 집에서 사시는 모습이 안타까워 교회에서 집을 고쳐주러 가면 오히려 자녀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녀들 생각에는 교회에서 자신들 어머니에게 헌금 받아내서 교회 목사님 생활에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히라도 마을에서 목사 만나기를 겁을 내는 게 현실이다. 매정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교회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성법교회와 성법리 마을 밖에 없다. 우리 성법교회 다음 후임자에게 든든하게 물려주는 그날까지 우리 교회가 존속되어야 한다. 성법교회가 118년 역사의 포항 초대 교회이기도 하고 포항지역 많은 교회, 장로님들이 우리 교회 출신이다. 성법교회는 포항지역 교회 일꾼들의 산파 역할을 성실이 감당해왔다.

성법교회 이승웅 담임목사가 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법교회 이승웅 담임목사가 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Q. 사역에 기준을 삼는 부분?

지난번에 우리 교단 김태영 전임 총회장님이 “성경에서 답을 찾고 예수님께 길을 물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너무 공감하는 부분이다. 내가 평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김태영 목사님이 마침 그 말씀을 하시더라. 그래서 너무 공감되어 그 기사를 벽에 붙여놓았다. 성경과 예수님이 내 사역의 기준이다.

Q.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는 매일 돈을 벌러 나가셔야 했기 때문에 집에 계셨던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게 됐다. 할머니는 울릉도 출신이신데 큰 부잣집에 살았다고 한다. 여자들은 서당 공부를 시켜주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남자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며 한문에 밝아지셨다. 어렸을 적 마을에 우체부가 한문으로 된 우편을 가지고 오면 우체부도 모르는 한문을 할머니가 읽어서 편지 주인을 찾아주고는 하셨다. 그리고 예전 분임에도 사고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여성들이 차별받던 시절이었지만 여자분들이 한방에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며 지낼 수 있게 배려도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께서는 93세에 돌아가셨는데 주일이면 몸을 씻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비녀 꽂고 교회에 가시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Q. 나의 대해 한 권의 책을 쓴다면?

나에 대한 책을 쓴다면 그 제목을 ‘나는 참 잘 살았다. 진실 되게 살았다.’라고 짓고 싶다.

우리 아들이 “아버지는 바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남에게 매번 당하고 살았다. IMF뿐만 아니라 보증 사기를 당한 일, 개척교회 때 장로님 땅에 교회를 짓고 허물게 된 일들 때문이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너무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 사람이 돈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줬고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준 거지 배신은 그 사람이 한 것 아닌가? 영화 국제시장에서처럼 “견디며 살아왔지만 참 힘들었다. 그런데 행복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주일 예배에서 축도하는 이승웅 목사
주일 예배에서 축도하는 이승웅 목사

ㅣ세상의 시선

감사가 사라지고 은혜를 모르는 시대
교회가 '구원의 배'이기에 교회에 들어와야 살 수 있다
'오직 성경에 답이 있다'

Q. 당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나는 주어진 것에 몰두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다. 그것이 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피할 길이 있으면 피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을 보면 참 안타깝다. 돈 위주로 자기밖에 모른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사가 없다.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속에 우리는 이리떼 속에 있는 양과 같다. 예전에는 진짜 먹을 것이 없어 미국이 원조로 준 밀가루로 죽을 쒀서 먹고 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덜 익은 보리로 떡을 해 먹었지만 그때가 살만한 세상이었다. 일할 곳이 있고 일하면 반겨주고 감사가 있었다. 일하고 나서 돈을 못 받더라도 밥만 먹여주면 감사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잘 사는 세상 같지만 죄가 만연해 있다.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 같고 노아 방주 시대와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건물은 작고 낡았지만 우리는 교회에 들어와야 살 수 있다. 교회가 구원선(배)이기 때문이다.

Q. 변화했으면 하는 세상의 방향은?

세상이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있다. 위험이 있으면 브레이크를 밟아야하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세상에서 이것이 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은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3장의 말씀처럼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고, 조급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도 제어해주지 못하고 우리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셔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답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목양실에서 만난 이승웅 목사
목양실에서 만난 이승웅 목사

Q. 코로나 19 시대를 사는 마음가짐과 독자들을 향한 권면?

이 시대는 세상에서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오직 성경에서 답을 찾고 예수님께 길을 물어야 한다.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 714

전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코로나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은 코로나를 주신 하나님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돌이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 상징인 교회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교회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눈물을 흘리든지 투정을 부리든지 간에 교회에 와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법교회 전경(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기북로1054번길 5-1)
성법교회 전경(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기북로1054번길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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